신동아 2010년 3월호에서 편집부가 한 정신병리학자를 초청해 촛불시위에 대해 ‘비이성적인 집단 광기’라는 분석을 내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귀 틀어막고 2년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신동아의 한계를 보며 피식하고 웃어넘겼는데, 이번엔 조선일보다. 역시 선거를 앞두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최근 조선일보가 지속적으로 촛불시위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며 나름대로 ‘실체를 공개한다!’고 선언했지만 사실 2년 전의 내용들과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조선일보가 내린 촛불시위에 대한 분석은 가령 이런식이다. 촛불시위는 마치 사춘기 때의 돌발적인 행동으로서 이성이 없는 질풍노도의 순간 정도로 넘기려는 시도이다. 그들의 판타지는 촛불시위를 잠깐의 ‘일탈’로 규정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선일보와 극단우익세력들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촛불집회에 70만명이 모이고, 하나의 커다란 사회적 조류를 형성한 것은 설명해주지 못한다.

 조선일보는 ‘좌파세력의 선동에 속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조선일보가 말하는 ‘좌파’들은 어떠한 채널도 가지지 못한 힘 약한 비주류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보수적인 공중파가 그 불순세력에게 우호적일리 없고, 보수언론들이 미디어시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시민들을 선동할 어떠한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다함께의 ‘이명박은 독재자다!’ 찌라시를 보고 촛불시위에 수십만명이 참가하고 국민 대부분이 지지를 보냈다고 보는 것은 사실 넌센스다. 게다가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동권을 혐오했다. 한 번이라도 촛불시위 현장에 와 본 사람들이라면 참여자들이 다함께와 같은 운동권이 확성기를 들고 앞에 서기라도 하면 곧장 야유를 보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촛불집회를 ‘386운동권의 종말’로 보는 시각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촛불집회에 대해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합리적이었으나 불순세력의 개입 이후 변질되었다’라는 애매한 판단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 불순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민노총이나 진보신당, 민노당은 촛불시위 초기부터 있었으며 불순세력이라고 불리는 일당(!)들의 몇 번의 시위지도 시도는 번번히 야유로 무산되었다. 촛불시위의 흐름은 ‘자발성’이라는 일련의 토대위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팩트와 감성 사이에서

 조선일보는 지긋지긋하게 '광우병은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 발병 가능성이 사실상 0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몇 년째 조중동이 주장하는 ‘광우병이 일어날 확률은 로또 당첨되고+벼락맞을 확률’이 실제로 어느 과학적 텍스트나 논문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글이 길어지지 않기 위해 아래 링크를 참조)
http://blog.naver.com/nuskool/80052336200 
 - 괴담보다 무서운 괴담, 40만분의 1?
http://play.mgoon.com/Video/V1550939/
http://play.mgoon.com/Video/V1550938/
http://ardownload.adobe.com/pub/adobe/reader/win/8.x/8.1.2/kor/AdbeRdr812_ko_KR.exe
 -
 2008년 5월 광우병의 실제 위험 가능성에 대한 서울대 수의학과 우희종 박사의 강연과 그에 사용된 PPT 


  2007년만 하더라도 광우병 위험 알리기에 적극 나서며 노무현 정부의 외교를 비판했던 조선일보는, 2008년에는 ‘미국소고기는 안전하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제는 모두가 파악한 이러한 ‘말 바꾸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떻게든 노무현+진보+좌파 세력을(이렇게 한 세트로 묶는 것도 참 어처구니 없지만) 트집잡으려는 시도’를 넘어 ‘조선일보를 중심에 둔 한국 기득사회의 이해관계’의 거대한 지도이다.

 노무현 정부가 처음 미국과의 FTA를 추진할 때 조중동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당시 대학 면접 준비를 한다며 조선일보의 사설들과 경제면을 탐독했던 나는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그 텍스트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몇 주 지나지 않아 갑자기 조중동은 FTA를 급찬성하는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단 노무현이 저질러 놓은 일이니 반대는 했으나, 자세히 알고보니 FTA를 통해 대형 기업들을 비롯한 일종의 대형 오너들에게는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금새 FTA에 대한 비평을 변경했다.

  어쨌든, 이러한 조선일보의 기사들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는 사람들의 바라는 바는 ‘나라를 말아먹는 좌파들이 몰락하고 천년왕국이 도래하는 것’이지만 1)좌파들은 나라를 말아먹을만한 힘도 없고, 2) 그들이 원하는 대로 좌파가 멸망하더라도 그들의 꿈꾸는 왕국이 도래하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 보인다. 평소에는 사회 개혁 세력들에게 ‘무능한 좌파’들이라는 딱지를 붙어대다가, 촛불시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에서 조선일보는 그 무능한 빨갱이들을 엄청난 파워로 언론을 장악하고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신시킨다

도망치기 담론

  우리는 어떤 딜레마에 부딪쳤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심리적으로 도망치기 일쑤이다. 알코올 중독자를 남편으로 둔 가정에서는, 그에게 정신과 상담이나 재활치료를 권하는 것 보다는 ‘술만 먹을 때만 그런 거야’라고 오히려 옹호하거나, 매일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지 않을 뿐인 경우가 많다.(우리 집도 그랬으니) 시험을 못 봐 스트레스를 늘 받는 하위권 학생은 공부에 대한 의지를 태우는 것 보다, 컴퓨터 게임으로 도피한다. 그리고는 곧 ‘학습된 무기력증’에 빠진다.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태도들도 같은 맥락이다.

  촛불시위를 인정하고 그것에 일종에 정체성을 부여하게 되면, 한국 사회 체계에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때문에 촛불시위를 비정상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어떻게든 깎아내려 도피하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건전하고 멋진 중간층의 신세계’인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이들에게 촛불시위는 그야말로 호환 마마 보다도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문제에서 도망치는 것은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거나 똑바로 바라보기 불편하다고 하다고 눈과 귀를 꽉 막고 욕을 해대는 짓은 곧 제 얼굴의 침 뱉기이다.

  광우병 논란과 촛불시위를 꿰뚫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패러다임의 문제이다. 예컨대, 멜라민 과자 몇 박스 먹는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구제역에 걸린 가축을 좀 먹었다고 해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멸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멜라민 파동 때 행정부의 수반이 ‘멜라닌 과자 몇 박스 먹는다고 사람이 죽나? 괜히 중국이랑 관계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조용하라’고 공석에서 말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전근대성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것들은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오고 있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 전근대성의 반복을 보면서 우리는 주기로 찾아오는 데자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
   천안함 희생자 가족을 위한 성금 모금 운동이 KBS에서 생중계되는 것을 보면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체감했다. 중계 내내 반복된 ‘범 국민적’이라는 슬로건에서  일종의 데자뷰를 느꼈기 때문이다.

  1997년 말 한국의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결혼 예물을 기탁했던 사람들의 태도는, 2008년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 때의 수십만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든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리고 이것은 2010년 천안함 성금 모금 운동으로 이어진다. 구조적인 재앙을 민족주의로 극복하려는 서민들의 순수한 심정이야 절절히 공감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감추어 버리는 레토릭으로 작용한다. 


  권혁범-‘‘태안의 기적’은 불온하다‘

   ‘1997년 말 한국의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초기에는 그것을 초래한 한국 경제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그것을 책임져야 할 정치·경제 엘리트에 대한 시민의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이 벌어지면서 갑자기 논의의 핵심이 개방적 ‘애국주의’로 옮아가고 그러면서 위기의 원인 및 책임에 대한 탐색은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위대한 한국인의 저력’ 강조는 손쉽게 민족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들게 하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중·장기적 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를 은폐하는 기능을 하였다. ‘온 국민’과 ‘범국민’의 난무 속에서 그 내부에 심각하게 존재하는 다양한 성, 계급, 계층, 지역 간 불균등한 이해관계의 재생산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요구는 설 자리를 갑자기 잃었다.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에 대해 가장 많은 박수를 쳤던 것은 누구였을까? 바로 해체의 벼랑 끝에 몰렸던 재벌자본이었다. 더구나 일부 진보층에서 내세운 ‘선진국 음모론’은 한국 사회의 내부적 변혁 요구를 되레 ‘외부’로 돌리는 데 중요한 구실을 담당했다. ‘경제를 살리자’ ‘의지의 한국인’ ‘다시 뛰자 태극기’ ‘제2 한강의 기적’ ‘제2 건국운동’ 등의 슬로건에서 구조적 원인과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렸다.’

  ‘연말이면 되풀이되는 ‘불우이웃 돕기’와 ‘소년소녀 가장 돕기’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안타까운 사정을 가진 ‘소녀 가장’에 대한 보도가 나오자마자 ARS로 성금이 쇄도한다. 언론은 이런 시민들의 ‘온정’을 부각시키고 성금을 사회적 약자에게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제 해결에 필요한 사회복지제도의 발전, 정책 변화, 정치적 결정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천안함 사건의 초기만 하더라도 군의 이상한 태도와 선체결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던 사람들은 ‘희생자들의 숭고함’을 헤드라인으로 밀고 나가는 언론들에 의해 시선을 돌렸다. 전국적인 분향소가 설치되고 장례가 이루어질 당분간 이러한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안타까운 영웅’이라는 이미지로 천안함 사건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상류층 절세 정책으로 몇 년 후 국가 재정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거나, 4대강 사업의 후유증으로 환경 재앙이 발생했을 때에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문제가 발생하게 된 구조적인 원인을 인식하기보다는, ‘나라를 살리자!’라는 슬로건과 함께 또 다시 금반지를 모으고 봉사를 할 것이다.

   결국, 천안함 희생자를 위한 성금 모금 운동을 가장 기뻐할 사람은 희생자들의 가족이 아닌 정부와 군 당국이다.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한 정부는 이제 한결 숨을 돌리고 보다 무난하게 사건을 마무리 지울 수 있게 된 셈이다. 여기에서는 우리는 온정주의로 포장된 한국 사회의 망탈리테를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
 

 웹 서핑을 하다가 대학생들이 등록금 인하투쟁을 보도하는 기사를 클릭했다. 그런데 밑에 달린 댓글 하나가 가관이다.


‘너희만 힘들 줄 아느냐, 가서 공부나해라!’


이 볼멘소리는 언뜻 보면 20대의 목소리가 '불평' 정도에 불과한 것이며 그들이 '공부나 할 존재'라는 데 설득력을 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나만 힘든 게 아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기상천외한 대학등록금과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의 불안정성, 좁은 취업문, 견고한 학벌 사회 속에 상당수가 피해의식에 시달려야 하는 대학생들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이에 거리로 나가 자신들이 겪는 곤란함을 의제화 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이것에 대해 그와 같은 식의 반응이 나오다니 - 이것은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기성세대의 하비투스를 충실하게 반영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징후적이다.


‘너희들이 열심히 안해서’


국어교육과 학생으로 생활을 하다 가끔 듣는 소리가 '니네가 열심히 노력을 안해서 임용에 떨어지는거야 이 무능한 것들아' 식의 담론이다. 이런 류의 '게으름과 노력' 타령은 편리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게다가 현실 직시적이지도 않다. 전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종종 이 '게으름 타령' 주저없이 내뱉는 이들의 얼굴가죽으로 구두를 만들고픈 욕구가 생긴다. 편한시대- 압축성장 시대에 사회로 진출해 비교적 쉽게 자리잡고, 수월하게 보유자산을 늘릴 수 있던 세대들. 물론 이들이 노력을 안했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노력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임용에 붙지 못했다고 졸업한 이들의 학창시절이 전부 '한심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도 불합리하다.


생각해보자. 30명 졸업생 중 1, 2명이 임용에 붙는다. 그리고 나머지는 안타깝게, 혹은 아예 포기해서 낙마한다. 게으른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열심히 공부하다 안타깝게 떨어진다. 이들은 모두 새벽을 꼭 새가면서 적어도 몇 년 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며, 학원, 도서관,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며 고3보다 더 피 튀기게 노력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게을러빠져서 임용에 떨어진다고? nope. 이것은 사회구조의 문제다. TO가 5%도 안 되는 교육인력시장의 문제인것이지, 이것이 우리의 나태함에서 비롯된 무능력인지는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할 내용이다. 이것을 아직도 '개인의 노력 문제'라고 판단한다면 당신은 말그대로 '전근대'이다. (지금이 포스트모더니즘 막 시작하는 때도 아니고 어느 시절 이야기 하고 있지?) 엄연한 구조적 문제이다.


위와 같이, 지속적인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는 사회현상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특히 탈 포드주의 이후 극단적 신자유주의를 택한 한국사회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MF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가 택한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한국은 '효율성'라는 가치 하에 '하방침투효과'를 극단적으로 노린 구조화 작업에 착수했고, 이 철학은 교육계에도 적용되어 현재 교육인력시장의 문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며, 앞으로도 상황은 별로 나아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허무개그와도 같은 담론들


'20대의 게으름' 담론을 주창하는 기성세대가 내놓는 '시스템의 문제를 자각하나, 어쩔 수 없지 않느냐'라는 투정 역시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를 애시당초 거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제시한 '의제' 수준 역시 '왜 서울대 가는 지방 학생들 비율이 줄어들까'에 수렴하며, 때문에 문제의 기저조차 파악하지 못해 그 해결은 멀기만 하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사회 흐름 인식에 대한 '전근대성'이다. 아직도 70, 80년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내뱉는 '너희가 열심히 하지 못해 패배자가 되는 거야'라는 기성세대의 꼰대 섞인 소리는 전근대의 전형으로 한국사회의 헤게모니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지금의 40-50대는 ‘노력을 하면 필연적으로 보상을 받는’ 시기에 사회에 진출했다. 두자리수 성장률을 기록하고, 사회 기반을 확충했던 시기에 사회에 진출해 가난함에서 서서히 벗어나 풍족함을 경험했다. 때문에 대부분은 ‘노력을 하고도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는 지금 20대들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386들과 기성세대들의 생각들은 '경쟁논리'로 승화되어 ‘그러니까 니가 열심히 해야지 어쩌겠냐’ 수준의 담론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은 진지하게 사회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움직임과는 정반대인, 아주 비학문적이고 비합리적인 행위인 것이다. 


즉, 현재 대중들은 인식론을 포기했다. 그래서 남은 것이 '윤리'인데, 이게 아주 낯선 것이다. 이전까지 윤리일 수 없던 것이 갑자기 윤리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경쟁해서 살 놈만 살게 하자”는 슬로건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문제들의 개선이 어려운 까닭은 바로 이 윤리에 바탕 한다. 사회안전망이나 뒷 세대에 배려 없는 정책 추진, 서유럽은 국민소득 5천불 때에 이미 시작한 취업지원 및 실업자 정책-지역사회와 대졸자의 연계, 지원-복지제도를 2만불 시대에도 시행하지 않는 정권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내 자식만 살아남으면 돼' 하고 사교육만 줄창 시켜댄 기성세대들이 모두 ‘88만원 세대’를 만든 공모자인 셈이다


진짜 문제는


다시 돌아와서, 진짜 문제는 대학의 현실이다. 높은 인풋-아웃풋을 자랑하는 서울의 사립대학생들 조차도 IMF 이후 '취업난'에 허덕이고 있다. '88만원 세대'가 이제 '인서울 대학교'의 학생들에게도 유효한 발언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물며, 지방대생이 겪는 고충이야 오죽할까. 그래도 우리학교 도서관이 늦게까지 붐비는 것은 이들의 ‘희망’을 놓지 않고 노력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그 '희망'을 현실화 한 사람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그 희망을 총량을 더욱 감소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구조자체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시도 없이 젊은 애들을 비난하기에 바쁜 '기성세대의 오만함'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
이번 이슈는 개인 블로그에 비아냥 거리 조차 여유롭게 넘기지 못하는 - 자유주의에 대한 위협일 뿐만 아니라, 유승준 사건과 마찬가지로 변태적 네셔널리즘의 극성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좆같은 나라야 시발'을 매일 입에 달고 사는 남녀노소들의 일상은, 한 연예인을 향한 변태적 애국심과는 분리된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 마녀사냥은 간단히 말해서, 한국인의 네셔널리즘이 극단적, 부정적으로 구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학적 탐구에서 개인의 의도에 중심을 두는 것은 위험하지만, 악플들을 달며 미국출신 한인연예인을 욕한 이들의 심정은 '한국을 너무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잘 걸렸다 잘난 미국 출신 자식' 쪽에 더 가깝다. 네티즌들의 하비투스가 나타난 전형적인 모습이다.

 

더군다나, 민족주의에 모욕을 주었다고 해서 그들을 마음대로 심판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일부 네티즌들의 착각은 도를 넘어선 듯 하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

1. 국개론적 접근 (제주 지역사회의 특수성)

 

- 87혁명 일으켜서 엎어놨더니 결국 노태우 뽑고, 친일파가 뿌리인 극단 우익 정당 지지율이 제일 높으며,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님을 탄생시킨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의 무지함과 전근대성은 제주도도 예외가 아닌가보다.....라기 보다는 제주도에서 대학교까지 나온 정치적 인물과의 이해관계가 도저히 투표장으로 사람들을 이끌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다. 제주도는 '유리 속의 어항'이라고 불릴만큼 폐쇄성을 지닌 도서지역이 아닌가. 이러한 특수성은 '형님, 삼촌' 하다보니 결국 그를 가련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귀결될 수 있다.

 

2. 공무원 사회의 압박에 대한 관찰

 

- 어머니와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도 보육담당 부처에서 '주민소환 투표를 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공문이 어린이집에 내려온 것을 알게되었다. 이 쯤이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이걸 선관위에 신고했더니 원장이 공문 다 없애고 어린이집 교사들(우리 엄마조차도) 다 입막음해서 증거가 없단다. 아뿔싸.

 

오마이뉴스가 발견한 '리장'이 중심이 된 주민소환 투표 거부 분위기 조성 현장 또한 하나의 이 초점에 뼈대를 이룬다. 뭐 이런식이다. 애초부터 시스템을 지배하는 사람을 시스템의 하부요소를 통해 몰아내려는 것이기 때문에 게임이 안 됐다는 것.

 

그나저나 적발된 32건 중에 사법처리 될 것은 겨우 2건 정도라니.

(솔직히 표선어린이집 사례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실제로 뒤져보면 셀 수 없을 만큼 공문과 압박이 쏟아졌을 것)

 

3. 20대 개새끼론 (국개론적 접근 2)

 

-... 이라고 욕하기 보다는, 20대는 '정치성'이라는 요소를 체감하지 못한 불행한 세대라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386이야 당연히 쳐부셔야 할 독재정권 밑에 있어서 다분히 정치적 의식이 성장했고, X 세대(지금의 30대) 역시 막 민주화 된 정권 아래 첫 세대로 윗 세대로 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절절히 정치성을 체감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어린시절 격투장이 된 국회를 TV에서 간접 경험한 이들의 정치적 의식 최대 도달점은 '국회의원은 개새끼' 정도에 불과했고, 신자유주의 정권들과 IMF를 거치며 '나 한 몸만 챙기던 놈들이 성공하더라'를 알게 된 20대들은 정치 문제 따위에는 신경쓸 여력이 없더라 - 이렇게 볼 수 있다. 특히, 우경화된 사회적 분위기는 '독재는 끝났고, 우리는 매우 합리적인 시대에 살고 있으며 문제는 없다 만세!' 쪽으로 굳어졌으며, 더 이상 누구도 정치와 사회를 입 밖에 꺼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정치와 저널리즘, 사회와 시사분야에 대한 학습된 '무관심'은 '중립성'이라는 개념으로 보호받고 있으며(그러니까, 나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한게 아니라 중립적인 입장일 뿐. 고로 난 짱임. 정치얘기 nope - 이런 류), 더 이상 술자리에서 정치/사회/저널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병신취급을 받기 일쑤이다. 정치성을 주변부로 밀어낸 채, '무관심'=중립으로 쉴드 치고 있는 20대들. 이런 이들이 반대급부(지연, 학연, 귀차니즘)를 극복하지 못하고 집에서 영화나 다운 받아 본 것이다. ㅠ

 

PS 1. 잠깐 근데 이게 왜 20대만의 탓이지? 응?.... 하여간 ...

무조건.... 만만한게 20대지...  모르겠다.(응??? 나는 왜 20대를 필두로 글을 썼을까... - -)

 

PS 2 - 결론: ㅅㅂ 좆같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

 선진국의 시위문화?

  전공수업시간중에 한국일보의 필진으로도 입지가 굳은 한 교수님이 촛불시위에 대해 평판을 내리며, '유럽에서는 경찰 패면 총살이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유럽의 시위문화에 대한 논문과 정보들을 수집하면서 동시에 영국에서 유학중인 지인에게 유럽의 시위와 한국의 시위를 비교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1. 한국시위는 폭력성은 우스운 수준이다.
2. 그에 반해 한국경찰의 진압은 기가막힐 정도이다.

 2006년 프랑스 방리유 사태와 같은 극단적인 시위의 경우에는 경찰을 불구덩이에 집어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경찰은 발포를 하거나, 시위자를 죽이지는 않는다. 다만 그 놈들을 두들겨 패서 체포할 뿐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시나병 하나 들고 자갈을 던졌다고 6명을 죽였다. 그래놓고는 '폭력시위를 했으니 당연한 결과'라는 담론이 조성된다. 

 시위를 하면서 경찰들을 심하게 다치게 하고, 주변 상점들을 초토화 시키는 일이 빈번함에도 유럽의 국가들은 매번 시위의 자유성을 보장한다. 낮이든 밤이든 시위를 할 수 있으며, 예상되는 격렬성에 상관없이 집회가 허가된다. 이것은 비단 방리유 사태 뿐만 아니라 수십년 째 이어져 온 통례이다. 보통 규모의 소요 사태에도 방화와 도난, 약탈등이 발생하는 것이 일상인 것이다.

 80년대 영국 파업에서는 늘 쇠파이프와 몽둥이가 등장했다. 서유럽에서는 우리가 보기엔 별거 아닌 것으로 시위를 하면서도, 늘 바리케이트를 치고 불을 지른다. G20 summit 때에도 이런 폭력성은 계속되었다. 차를 가지고 와서 은행의 벽을 박살내기도 하며, 산별노조들의 파업에서는 늘 거리의 유리창이 수십개씩 박살난다. 신기한 것은 그 때마다 유럽경찰은 시민을 보호하는 동시에 시위자도 보호하는 포지션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촛불집회는 같은 소요사태임에도 방화나 약탈이 단 한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공권력은 강력한 노조 시위도 아닌, 비교적 낮은 정도의 과격성에도 불구하고 물대포와 연행진압을 한다. 이것도 문제지만 정작 문제의 본질은 '그런 폭력진압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태도의 비합리성과 전근대성에 있다.(촛불시위를 '폭동'이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메이저 외국 언론매체에 가서 외국의 폭동 영상 한 번 봤으면 한다. 입이 진짜 쩌~억 벌어질 걸.) '시위를 허용하는 게 권리고 민주주의라고? 에라 그럼 폭도들이 다 나라 말아먹으라고?' 수준의 담론은 정반대의 극단적 담론-'이명박은 경찰들을 시켜서 곧 발포할 것이다'라고 예측한 네이버 댓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극단적인 상황을 '창조'해서 상대방을 깎아내리려는 시도는 별로 논리적이지도 않고 유용하지도 않다. 

 인식의 '전근대성'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이 시위의 폭력성을 국가적 창피라고 생각하는 전근대성에 있다. 유럽에서는 데모가 빈번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개쪽이다' '나라망신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그 시위를 자유롭게 보장하는 '피곤한 민주주의'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몇 명이 쇠파이프 가지고 경찰버스를 부순 것을 가지고 '10만명이 폭력시위를 한다' '광란의 광화문'이라는 담론이 조성된다. 물론, 폭력이 아예 없었으면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트병 몇 개 던진 것에 대응하여 방패로 여고생 머리를 찍어버린 태도를 보고 자연스럽게 시위는 과격해졌다. 이어 공권력의 비정상적 수행에 대한 논의없이, 극단보수언론들을 통해 촛불시위=폭력시위 라는 프레임이 형성되어 버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유럽에서 경찰패면 총살한다'는 구호는 100% 거짓말이다. 출처도 알 수 없는 불분명한 정보를 가지고 공공연하게 담론을 펼치는 교수님의 태도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의 태도는 한국의 인텔리가 어떠한 사회과학적 현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전근대의 프레임으로 단편적인 분석을 내놓는다는 것을 나타낸 셈이었다.  

 촛불시위를 어떤 외신도 '쪽팔리고 창피한 운동권들의 광기'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집단광기라는 이름표를 붙여 평가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보수 미디어는 아직도 촛불시위가 '아주 쪽팔린 일'이라고 자평한다. 하지만 우리가 창피하게 여겨할 것은 유럽애들이 보기에 우스운 수준의 일부 폭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시위 혹은 더 큰 폭력에 대항하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적 폭력이 아니라, 70년대 후진국 수준의 진압을 하는 경찰과 행정부의 태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
어머니와 함께 '투모로우'를 DVD로 본 적이 있다. 영화내내 극적인 CG에 압도되셨던 그녀가 영화가 끝나자 한마디로 감상을 남겼다.

 '미국은 정말 멋진 나라구나'

이 감성은 트랜스포머2에서도 유효하다. 이 영화를 지배하는 구도는 '권선징악'이나 '나쁜놈vs착한놈'이라기 보다는 가족애, 사랑, 우정의 프레임이다. 그리고 그 가치가 '미국적인 것'임을 영화 내내 강조한다. 극적으로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고, 서로를 위하는 장면마다 웅장한 전주가 흐르고 미국국기가 펄럭인다. 다시 말해, 미국은 섹시하고(메간 폭스의 몸) 강할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숭고한 가치들도 존중하는 멋진 나라라는 것이다. 시몬스 요원의 존재는 이러한 미국가주의적 감성이 집약체이다. 대놓고 '애국심'을 말하는 이 퇴역특수요원을 영화는 유쾌하게 포장하고, 중요한 순간에는 근사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미흡한 개연성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보이는 허약한 스토리구조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 영화가 전형적인 미제국주의적 상상력을 곳곳에 뿌려놓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트랜스포머가 미군의 지도 아래 협력하는 모습, 미군들의 장비와 기기들이 잘 구현된 전투 장면, 그리고  해군함정에서 발사된 미사일로 결정적 위기를 막아내는 장면은 마치 이 영화가 미군의 홍보영상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

무기력증 Interlude

비아냥 2008. 11. 25. 20:59


"지식의 차이는 분명 존재합니다.
이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토론이 별것아닌 사람이 별것아닌 문제로 우쭐거리는
우월의식으로 가득 찬 쓸데없는 탁상공론은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이런식으로 멀리서 뒷짐지는 말씀이 머리꼭대기 위에 올라앉아 보겠다고
갖은 생색을 내는 근거없는 쌩투정으로 밖엔 보이지 않네요.

그리고 무지는 절대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 우월한 것이 아닙니다"
- hiphopplaya.com 자유게시판의 리플중에서


"와... 형, 우리 수업 들어오는 남자 선생들마다 전부 축구 전문가들인데?...다 아는 척 해 "
- 2006년 6월, 당시 같이 고3을 보낸 반친구가


"이명박 보다 잘 할 자신있어? 근데 왜 씹어? 그 자리가면 다 그렇게 됨... 아차,
우리도 선배 막 씹잖아? 근데 우리가 막상 선배 자리가면 그렇게 못 할 듯... ㅎㅎ"
 - 2008년 6월, 멀리있는 친구 한 명이

"한준희.. 갈라스보다 축구 못하면서 왜 걔를 씹지? 재수없네"
- 2008년, 한 축구 전문 사이트 게시판에서

"진중권.. 개색희... 비판비판비판만 존나 쳐해대고 그 자리가면 더 잘할자신 잇냐??? ㅎㅎㅎ 좆까라" - 2008년, 디씨인사이드 뉴스게시판 리플란에서

_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한다.
예컨데 많은 이들이 사소한 자랑거리 외에도- 좀 더 그럴듯한 영역 - 사회, 정치에 대해서 의견을 근사하게 포장하며, 멋져보이려 한다.  하지만.. 무지한 이들의 발언들은 그 자체로 위험할 때가 있다. 그 발언 대부분의 본질은 '정치적 무기력함'이며, 동시에 청자에게도 '정치적 무기력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책은 미국의 민주당이 매번 공화당에게 패배하는 상황을 기막히게 설명해준다. 서민에게 실제로 이익이 돌아갈 정책을 추진함에도 불구하고, 중산층 이상 + 대기업 이익 중심 정책을 펼치는 공화당에게 매번 패배하는 데에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익에 배반하는 투표를 하는 서민층의 행위에 대해 '프레임'이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저자가 말하는 프레임이란 사회적 언어를 개인이 받아들일 때 갖추는 '필터'를 의미한다. 프레임은 개인이 사회속에서 가치판단을 할 때 주요한 준거가 되는 동시에, 그 프레임을 통해 많은 사안을 해석한다. 그리고 그 프레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것은 과감히 배척한다. 따라서 누가 먼저 이 '프레임'을 제작해 보급(!)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미국의 보수진영은 오래전 부터 막대한 투자와 연구소, 매체 장악, 저명한 보수 명사들의 활약을 통해 대중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필터인 '프레임'을 먼저 만들고 퍼트렸다. 그리고 후발주자인 진보진영은 새로운 정보와 정책을 만들었지만, 이것을 대중들은 '프레임'에서 볼 때는 '좌파들의 비효율적인, 비경제적인, 소모적인 정책'으로만 느꼈을 뿐이다. 보수진영의 이미지 전략의 성공이다. 즉, 프레임이라는 개념은 '이미지 마케팅'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무식함이 아닌 오만함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책이 놀라운 것은 속의 상황들이 국내의 경우에도 잘 부합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먼저 대중들의 프레임을 선점했으며, 대기업, 유산계급 위주의 정책을 펼칠때에 '경제발전' '대기업이 살아야 한국이 삽니다'라는 문구 혹은 애국심을 사용했다.(특히 이 이미지 마케팅은 '경제대통령'이라는 수식어에서 빛을 발했다.)그리고 엄청난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 보수정당이 미리 설정한 프레임을 지닌 서민들에게, 진보 정당들의 정책들은 그저 '빨갱이' '친북좌파' '비효율'로 귀결될 뿐이었다.(그것이 자신들에게 직접 이익이 돌아갈 내용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대중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한나라당 정책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착각속에서, 자신에 이익에 반하는 지지행위를 계속한다.

 
그렇다면, 작년 대선때 지방대학생회들의 이명박 지지선언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미지 마케팅에 의한 판단력 부족' 혹은 '무식함' 과 같은 차원의 문제였을까?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노선은 지방대생들에게 불리한 것 투성이다. 경쟁과 시장자유, 포디즘과 독과점을 기반으로 한 정책들은 결국 지방 대학생들에게는 '독'이다. 효율성을 중시해 기반이 있는 곳에 투자를 하고, 지방에는 경제적 혜택을 주기 힘든 정책들이 그동안 이들의 지향점이었다.  따라서, 지방대생들은 '이명박 반대'를 외쳤어야 타당할 것인데, 되려 적극지지를 선언했다.
 앞서 말한 프레임의 문제 탓일까? 정말 그 이미지 마케팅 전략에 속아서?

 아니다. 답은 그들이 지역 정치세력과 맺은 이해관계에 있다.'학생회장이 ㅇㅇ지구당에서 거액을 받는다'는 수준의 담론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확한 회계보고를 요구받지 않는 상황에서 지원금과 재단의 명목으로 지원되는 '검은 돈'의 판은 무법천지이다. 그리고 이 무법천지의 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단연, 가장 강력한 지역세력과 자금력을 지닌 거대보수정당이다.

 
간단하다. '매수'당한 것이다. '학생회장이 되면 본전을 뽑는다': 이 레토릭은 음모론이 아니라 현실임을 학생회 임원들, 지금의 대학생들, 과거에 대학생이었던 사람들 이 모두가 파악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매수'는 불과 1,2년전 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음모론'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실' 이 된 결정적 순간이 2007년 12월,  바로 '지방대생들의 이명박 지지선언'이다.

이해관계- 연결고리에 의해 특정후보지지를 선언해놓고는, 변명이라고 내놓았던 것이 '이 후보에게 이렇게 호소하는 것이 취업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 정도의 레토릭이니, 이들의 얼굴 가죽으로 구두를 만들고 싶은 충동마저 느껴진다. 

비극에서 코미디, 다시 비극

2008년 여름, 대선때 이명박을 지지했던 학생회가 지역 촛불집회를 이끌었다. 그들이 '이명박의 오만함'을 거론하며 촛불지지를 선언하는 순간, 2007년 12월의 '비극'은 2008년 6월 '코미디'로 재탄생했다. 그들이 거론한 '오만함'은 이 반전의 기막힌 중심소재이며, 소속학교 구성원들의 지지를 정치적 권력으로 재활용하려 한 그들의 '오만함' 역시 이명박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시 문제는 대학의 현실이다. 높은 인풋- 아웃풋을 자랑하는 서울의 사립대들 조차도 IMF 이후 '취업난'에 허덕이고있다. '88만원 세대'가 이제 '인서울 대학교'의 학생들에게도 유효한 발언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물며, 지방대생이 겪는 고충이야 오죽할까. 그래도 이 지방대들의 도서관이 늦게까지 붐비는 것은 이들의 '희망'을 놓지 않고 노력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그 '희망'을 현실화 한 사람의 수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그 희망을 총량을 더욱 감소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학생회의 이해관계 - '오만함'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

불과 작년만 해도 광우병이 무엇인지도 체감할 기회도 없었던 국민들에게 미디어들은 커다란 역할을 했다. 굳이 인터넷 언론들이나 일부 진보적 매체들 뿐 아니라 공중파 방송들도  정부가 커다란 실수를 했음을 ‘사실’로써 보도했으며, 보수 언론들도 이 사태를 만회하기 위해(!) 보도행렬에 동참해야 했다.

 관련 부처와 이명박 행정부는 미국산 소고기가 안전하다는 근거로 ‘OIE’라는 국제기준을  밝혔다. 얼마 후 수의사들과 이 분야의 전문가들, 몇몇 용감한 언론들은 그것이 ‘권고 수준’에 불과하다고 국민들에게 알렸으며, 이에 대응한 정부측의 태도는 다음과 같았다: “로또 당첨되서 은행가는데, 벼락맞을 확률. 40억분의 1” 


 보수 언론들과 광우병 파동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던 사람들에게 이 말은 불리한 상황을 개선시켜 줄 'Punch line'이었다. 이 한 문장은‘생명, 먹거리 문제는 확률로 계산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사람들의 주장조차도 한순간은 압도할 수 있을만한 파괴력을 가졌으며, 토론회 단골 발언으로 자리 잡은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출처가 불분명한 ‘괴담’ 수준의 정보이다. 이 내용을 주장하는 측은 ‘어느 일본 학자의 이론’이라고 그 뿌리를 밝혔으나 광우병과 관련된 분야의 어느 학계에서도 출처를 밝힐 수가 없다. 그들의 입장대로 단순히 '사람 수를 나누고 더한' 것이라면 - 간단히 숫자놀음을 해보더라도, 공식 인정된 영국 내 광우병 환자가 165명, 미국인 광우병 환자가 3명, 전 세계적으로는 200여명이 넘는 상황에서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밖에 할수 없다. 국내의 몇 안되는 광우병 연구자 중 한명인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5월 24일 시민들을 대상으로 가진 강연회에서 이 내용에 대해 “일본 어느 학자의 이론 정도로 인식하고 있으나 그것이 불분명 하고, 사실상 그것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조차 ‘강하게 검역 기준을 강화한 일본의 경우에서 앞으로 광우병이 발생할 확률’을 주장한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사실상 어디서 그런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것과 관련해서 통용되는 것이 이른바 ‘감염 가능성 0.01%’이론이다. 찬성론자들의 대표 논조로 일컬어 지는 이 내용은 아직까지도 출처가 불분명하며, 혹은 일반적 인식대로 이것이 ‘전체 소/ 감염 소’의 비율로 산출된 것이라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감염 가능성'과 '전체 소 중에 감염된 소의 숫자'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설사, 그들의 주장대로 '감염된 소의 숫자 = 감염 가능성'이라고 받아들이더라도, 이에 따라 계산을 해본다면 현재 미국에서 도축되는 소는 약 3천 4백만 마리이다. 그 중의 0.01%는 340마리이다. 340마리.


 찬성자들이 내세운 근거들은 학계에서 정식논의된 것이 아닌 정치가들이 몇몇 도표를 뽑아내 재작성한 것으로 학문적으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괴담’ 수준의 내용들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정설에 가까운 사실로 여기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없다.


 사실,  이 내용들을 인정한다고 해도 ‘아직 과학적으로 그 과정과 핵심이 증명되지 못한, 완전히 통제되지 않은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0.01%라는 것은 심각한 것이다만, 최소한  ‘괴담’과 ‘사실’은 구분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제 정부가 대답할 차례이다. 누가 ‘괴담’을 퍼트렸는가?

Posted by 양피지조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