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촛불집회 이후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의제 중 하나가 바로 '소통'이다. 이 소통에 대한 담론들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효과적인 의사전달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제도권 정치와 시민사회가 만나는 합리적 장(場)에 대한 요청이기도 했다. 이 공익광고는 소통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뤘다는 점에서 2년 전 요구에 대한 주류사회의 하나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광고는 분쟁과 갈등을 부정적인 태도로 간주하며 그것을 '마음 속 리모컨'으로 형상화한다. 곧이어 타인의 생각을 인정하는 윤리를 강조하며 '마음의 문을 열어라'라는 요청을 한다.

  최근 몇 년 간 사회적 갈등이 경제적 위기를 자초한다거나, 시위의 폭력성이 우려된다는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놓았던 행정부와 언론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마음 속 리모컨>이 형성하는 의미는 명확해진다. 다시 말하면, <마음 속 리모컨>은 '갈등'을 해결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봉합하고 숨겨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한국 주류사회가 지니고 있는 전근대적인 사고의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전근대성은 '갈등은 나쁜 것'이라는 전제이다. 사실, 갈등은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한다. 특히 그 불균형의 원인이 사회의 불합리한 역학이나 현실정치에 있을 경우 발생하는 갈등은 비합리성을 개선하고 사회성 건전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굳이 갈등주의적 관점을 취하지 않더라도, 갈등은 해결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태도는 갈등의 원인이 되는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광고의 서사에서 갈등은 해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숨기고 봉합해야 할 금기이다.

  제작자가 직접 밝힌 <마음 속 리모컨>의 주제에 대한 설명은 이와 같은 측면을 더욱 부각시켜준다. 제작자인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가 직접 '사회공동체-벽 허물기(소통을 통한 사회통합)'가 주제라고 밝히고 있는 이 광고에 '관용과 배려를 바탕으로 사회통합을 이루지 않고서는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설명도 추가로 덧붙이고 있다. 비단 강정 해군기지 논란뿐만 아니라, 한진중공업이나 무상급식 논쟁과 같은 일련의 사회적 논쟁에서 등장하는 '사회통합'과 '갈등 봉합' 표현이 함의를 감안할 때, 위 설명은 갈등에 대한 주류사회의 정서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국민총화'와 같은 레토릭까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갈등은 해결이 아니라 나타나서는 최대한 빨리 사라져야할 안 되는 불합리한 상황으로 인식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인식이 정치공학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광고가 의도하는 바는 더욱 뚜렷해진다.


<마음 속 리모컨>의 레토릭

  마음 속 리모컨을 끌 것을 요구하는 나레이션과 함께 화면 가득히 '대한민국 사회갈등 비용 연간 300조원' 텍스트가 등장한다. '사회갈등 비용 300조원'이라는 문장은 최근 정치인의 강연이나 인터뷰, 신문기사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사회갈등 비용 300조'는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한국의 사회갈등과 경제적 비용’ 이라는 보고서에 포함된 내용이다. 회원국이 돌아가며 개최하는 회의인 20개국(G20) 정상회의의 경제효과를 최대 24조원으로 추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혹자는 수치의 과장을 의심한다. 특히 이 보고서가 참여정부의 참여민주주의를 실패로 결론 내렸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그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이 조사의 방법론과 신뢰성에 대한 판단은 이 분야 전문가의 영역이다.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는 그 수치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저 레토릭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억압'이다.

  최근 몇 년 간 한국 사회 발생한 사회적 대결은 사회적 약자의 실력 행사로 부터 시작되었다. 촛불시위 이후로 용산참사, 쌍용차 파업, 한진중공업과 희망버스, 명동 마리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나 비정규직, 세입자들과 같은 상대적 약자와 비교적 갑의 위치에 있는 자본과의 충돌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충돌이 빈번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한국의 정당정치가 사회적 약자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도 볼 수 있고, 법적 행동보다 항의전술이 언론의 집중을 얻어내는 데 더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법적·사회적 제도의 불합리로 인해 약자들이 극단적 행동 말고는 별다른 탈출구가 없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 원인이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소요사태가 표출되는 때, 그 상황을 유발하는 주체로 인식되는 것은 결국 사회적 약자 쪽이다. 즉, 제도적 문제나 자본의 폭력성을 지원하는 구조는 수면 밑에 머물러 있으며, 표면적으로 볼 때 사회적 갈등을 유발시키는 이들이 결국 집회나 피케팅을 하는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이다. 따라서 이 광고는 이들을 부정적으로 이미지화 시키는 데 일조한다. '사회적 갈등 300조'라는 문구가 오버랩 되는 순간 시청자들과 청취자들은 필연적으로 이슈화된 시위현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으며, 이 경제적 피해를 만드는 시위의 참여 주체들이 '사회악'으로 형상화 된다. 


샌델과 대한민국

  그렇다면 대중들은 이 광고를 어떻게 수용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2010년과 2011년에 걸쳐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은 이 교양서적은 처세술과 성공학 책들을 밀어내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세를 이루었다. 그 흐름은 지금도 이어져 손꼽히는 추천 교양서로서의 입지를 차지했다. 책과 더불어 그의 실제 강연이 녹화된 DVD가 불티난 듯 팔리고, 샌델의 국내 강연회에서도 대학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작가가 하버드 교수임을 내세운 출판사의 홍보 마케팅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 센세이션이면 뭔가 다른 요인을 찾아야 하는 게 정상이다. 

  사실, 내한 강연을 왔던 샌댈 교수는 그에게 폭발적인 관심과 열광에 의아해 했다. 그의 책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거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의견의 불일치를 받아들이고 도덕적 분쟁을 인정하는 것”을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첫 단계라고 제시한 책이었다. 이 상식적인 내용이 한국에서는 폭발적 인기라는 사실에 샌델 교수는 놀라움을 나타냈다. 동시에 그는 이에 대해 “한국 사회가 그만큼 정의를 갈구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의견 불일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공공논의의 장을 마련해 정의, 공공 선(善) 같은 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것이죠."

- 마이클 샌델, 2010년 방한 기자간담회에서

  그가 말하는 정의는 일종의 공공 선(善)이다. 이 공공 선은 모두가 합리적으로 인정할만한 보편적인 가치 이자 기준으로, 이 공공 선에 대한 합의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는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즉,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제작되는 공익광고는 공공 선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가치를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마음 속 리모컨>은 그 공공 선에 대해 판단이 작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성과 관용이라는 원래의 취지를 배반하는 결과를 낳는 자가당착에 빠져버렸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은 이러한 광고 이면의 의도가 수용자들에게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마음 속 리모컨>의 나타내는 '갈등에 대한 혐오'와 대중들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혐오'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갈등에 대한 혐오'는 '정치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사장되고, 결국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이라는 대중적 욕구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그 대중적 욕구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광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마음 속 리모컨>은 다른 공익광고와 비교해서도 수용자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고 별 다른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한 반면, <정의란 무엇인가>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마음 속 리모컨>과 같은 광고는 의견의 불일치와 갈등을 단정적으로 부정하는 '정의롭지 못한 광고'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 속 리모컨>은 그 자체로 논리적 결함을 지닌 동시에, 샌델의 책과 달리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요구를 분석해 내는 데에도 실패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의 정서가 이러한데, 타자인 샌델이 이 광고를 보았을 때 그의 반응을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시에 그는 그제야 그리 특별하지 않은 그의 책이 어째서 한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는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부터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소통'이라는 의제는 <마음 속 리모컨>이라는 광고와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 사이에서 이와 같이 재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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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와 SNS 사이에서

  질문은 다시 이렇게 정리가 가능하다.'구매체는 이 흐름에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매우 간단하게도 기본적인 개념의 '정론지'가 되는 것이다. 신매체들은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고, 개방성과 상호작용성을 지닌다. 이것은 그들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동시에 치명적인 결점이기도 하다. 다양한 정보가 필터링 없이 범람하여 질은 보장되지 못하며, 직접 눈으로 앞에 존재하는 인쇄된 출판물이 아니기 때문에 수용자는 가볍게 그것을 넘기기 쉽다. 예컨대, 조회 수가 높은 기사에는 필연적으로 리플이나 트랙백과 같은 피드백의 기능을 통해 추가의 의견이 개입된다. 그리고 이것은 수용자로 하여금 기사 자체의 텍스트와 함께 또 다른 의미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은 구매체가 인터넷 매체 보다 더 깊이 있는 담론을 생산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인터넷 블로그의 글들을 열독하는 대신 책을 구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범위를 어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인터넷에는 다양한 정보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는 '파편화'되어 있다. 때문에, 이를 하나의 유기적인 담론으로 재구성해 낸 체계화된 책이나 지면신문과 같은 매체가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정보의 신속성이나 흥미성은 충족이 되었지만 그에 따라 오히려 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담론을 찾기 힘들어진 까닭이다. 신문의 경쟁력은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돈을 주고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매체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들은 새로운 대응방식을 모색하기 보다는 점점 무협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반면 SNS나 위키리크스 같은 현재 가장 뜨거운 매체들은 점점 정치와 사회 경제에 치명적인 플랫폼이 되고 있다. 만약 한국의 신문들이 지금과 같은 갈등적 구도와 과잉적 수사에만 치중할 경우 구매체의 가치는 가까운 미래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스포츠 신문의 연예면이나 다를 바 없는 정치 기사들에게서 그 어떠한 '정통성'이나 '권위'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은 흥미가 떨어지고 생소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돈을 내고 구입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프랑스의 <르 몽드>나 영국의 <가디언>을 '이 언론의 논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돈을 내고 구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권력과 자본에 독립적인, 공신력 있는 정론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거리에만 치중한 무협지와 같은 기사들이 지양되어야 할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정론지' 형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명감이나 언론윤리와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가까운 미래에 살아남기 위한 존속의 문제이다.


-ps 그럼에도 여전히 대안은 모호하고 애매하다 : 그런 언론을 정말 사람들이 바라기는 하는 걸까? 그런 언론이 등장한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고 구입할까? 이 질문에는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권력과 자본으로 부터 독립적이며, 다수의 대중들이 인정하는 - 정론지를 가져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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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은 늘 곤혹스럽다. 왜 정치얘기만 나오면 결국 멱살을 잡고 싸우고 마는 것일까. 추석 때 마다 벌어지는 노사모인 삼촌과 박정희 찬양자인 할아버지의 다툼 사이에서 나는 늘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아버지는 우리 가족만큼은 절대 정치 얘기를 하지 말자고 합의를 보았다. 명절 날 친척들 사이의 '소통'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무림 고수들 간의 대결

  현재 한국 신문들의 정치 기사는 삼국지 인물들의 세력다툼이나 무협지의 서사와 너무도 유사하다. 특히 정당정치를 다룬 기사들은 제목 뿐 아니라 내용까지도 마치 삼국지의 번외편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제도권 정치에 조직 간의 알력이나 인물들 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러한 이슈들은 정당정치에 있어서 주변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주요 인물들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자극적인 기사들이 올라오는 이유는 제도권 정치 내에 어떠한 이슈, 시의성 있는 사건을 다룬 기사에 비해 훨씬 잘 팔리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를 구성하는 문체는 더욱 무협지와 유사하다. 세련되지 못할 뿐 더러 인물 중심의 갈등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과잉적으로 사용된다. 사건을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으로 풀이해주는 대신 '00파, 종북좌익, 결집, 격돌, 승부처' 등 화려한 수사만 가득한 상황이다. 이는 갈등적 서사와 더불어 기사가 내포하고 있는 상황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준다. 이처럼 인물들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서사와 과잉적 수사가 현재 한국 매체의 정치기사들의 현실이다.

  문제는 대중들이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제도권 정치를 계파간의 투쟁이나 영웅들의 서사시처럼 단순화 시켜버리는 것이다. ‘수사적 단순화'를 통해 복잡한 정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실제는 정반대이다. 수용자들은 구체적인 사실 대신 수사적 문구들만을 기억하게 된다. 24시간 뉴스를 청취하며 생활하는 택시기사들의 정치적 담론이 종종 비난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뉴스와 일간지의 정치기사들을 보며 한국 정치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읽는 것들은 속이 텅 빈 '레토릭' 덩어리에 불과한 셈이다. 결국 이를 수용한 대중들은 정치를 대결식 구도와 과잉적 수사로만 인식하게 된다. 흥미를 자극해 가십을 만드는 이러한 주류언론의 태도는 사회를 천박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진보'과 '보수'를 양 축으로 한 한국인의 이분법적인 정치 프레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적 토론이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데 언론들이 강한 원인 제공을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신문들은 상업주의를 극복하기는커녕 그 구조에 순응하여, 언론을 더 좋은 수익사업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단순히 '언론윤리를 배반한 타락한 언론들!'하고 비난만 한다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해 혹자는 '언론이 각성하면 된다.'는 식의 해답을 내놓지만, 이는 자본이라는 상부구조를 경시한 허무한 외침이다. 정치 기사의 가십화는 언론도 수익을 내야한다는 기업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판매부수는 광고수입과 직결되고, 때문에 구독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내야 한다. 고객의 시선을 끌 수 있도록 정치 뉴스는 과잉적 수사로 포장된다. 최근 포털사이트가 온라인에서 가판대 역할을 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 결과 주류언론의 정치 기사가 스포츠 신문의 연예면과 다를 바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구독률 전쟁 때문에, 연간 구독료보다 많은 상품을 제공하고 고객 모집 전쟁을 펼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런 자극적인 구성이 단기적으로는 수익을 올려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살 행위와 다름 없다. 스스로 경쟁력을 깎아 내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 언론이 무협지를 쓰고 있을 때 위키리크스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매체가 어떤 파급력과 내용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지 지속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해킹이나 불법적 방법이 아닌 내부 고발자들의 자발적인 정보 제공을 통해 새로운 판을 개척한 것이다. 대표적인 SNS인 트위터는 140자라는 제한으로 인해 간단한 형식에 많은 내용을 압축해낸다. 동시에 팔로우(Follow)와 리트윗(Retweet)이라는 기능을 통해 온라인상에서 그 영향력은 더욱 강력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과연 한국의 신문들이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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