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슈가 그렇지만, 특히 FTA는 어디서 부터 감을 잡아야 할 지 막막하다. 일반인이 각론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텍스트의 양이 너무 방대하고 전문적이며, 정치공학적 논리까지 겹치면서 도대체 어느 신문의 어느 부분을 읽어야 할 지 어느 전문가의 글을 읽어야 할 지 난감할 따름이다. 'FTA 의 최대 수혜주는 과연 누구인지', '왜 사람들이 FTA 반대하는 데도 하려고 하는지', '독소조항이 도대체 뭔지', ' FTA를 하면 우리나라 자동차 기업은 유리하고 서비스기업은 불리하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말인지',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복잡한 문제에 '그러니까 FTA 나쁜 거예요? 좋은 거예요?' 단답을 요구하는 건 도둑놈 심보이다.

  따라서 이 분류의 글들은 머리 아픈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효과적인 핵심을 알 수 있도록, 일종의 '교통정리'의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지금까지의 웹 상의 FTA 논쟁들은 주로 반대편의 가장 낮은 수준의 논리를 대표타겟으로 설정해 반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표본 설정은 상황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전문가들이 낸 책들 조차 대부분이 이슈에 편승하려는 상업주의적 성질을 띤, 자기계발서 형식의, 레토릭 투성이었다. 때문에 이를 걸러내, 넘쳐나는 자료들 중에 한미 FTA 협정 기본 텍스트에 근접한 구체적인 정보들을 모아서 재구성해 정리하려고 한다.

쉽게 말해, 이 분류의 텍스트들은 사람들이 괴로워할만한 과정 - 정보수집과 분류 -을 대신한 결과물의 모음인 셈이다.



<목 차> <- 수시로 변경됩니다.

1. FTA의 기본 개념 - FTA의 기본적인 정의와 개념, FTA의 구체적인 내용, 추진 목적, 추진 과정
2. 추천할 만한 텍스트들 - FTA를 잘 설명했다고 평가할만한 책과 칼럼, 웹 사이트 추천
3. 찬성측의 주장 - FTA를 추진해야하는 이유, FTA의 기대효과, 괴담과 루머 반박
   반대측의 주장 -  FTA를 추진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FTA의 위험요소, 독소조항
4. FTA와 이해관계 -  FTA를 둘러싼 정치공학적 요소 정리  
5.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의 사이에서 - FTA가 21세기 한국 사회와 만났을 때 


c u soon.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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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에서 실패하고 사라진 <지구를 지켜라>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신기하게도 극장에서 막을 내린 뒤 네티즌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가 극장에 보급될 때는 몰랐는데 다시 다운받아 보니 굉장히 괜찮은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네티즌들은 이 영화 흥행 실패의 이유로 1) 우스꽝스러운 포스터 2) 이해할 수 없는 제목 을 이유로 들었다. 실제로 영화 자체의 세련된 모습이나 깊이에 비해 포스터와 제목은 도저히 '돈 내고 볼 마음'이 들게 하지 않았다. 

한윤형의 <안티조선 운동사>도 이와 마찬가지로, 제목을 안티조선 운동사로 지은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정당정치에 관해서는 '중립'과 '무골호인'이라는 자세가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우리나라에서 '안티조선'이라는 단어를 정면으로 사용한 것은, 대중들의 일반적 프레임으로 인해 '부담스럽고',  '편향된' 첫 인상을 갖게 할 것이 뻔해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결점은 제목이 '안티조선 운동사'라는 데에 있다. 하지만 사실 이 책은 전형적으로 '조선일보 까는 글'이  아니다. 따라서 나중에 이 책은 몇 년 후에야 한두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책이 걍 묻혔지???'와 같은 반응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특정 사회운동을 넘어서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의 사회현상과 이슈들에 대해 정확하고 분석을 하고 판단들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고는 싶은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몰라서 따라잡기가 어렵다', '한나라당이 나쁜 것 같긴 한데 그 이유는 모른다' 혹은 '민주당과 노무현은 정말 천사일까?' 하는 의문, '국회의원들은 똑똑하다는데 왜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욕할까?', '선거 후 공약은 왜 안 지켜질까?', '한나라당이니..한나라당을 밀고 일어설 민주당이니.. 하며 시글벅적한 거리..'에 대한 불편한 의문들과 같이 초보적이면서도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도 애매한 질문들에 대한 명백한 답변이 되어준다.  

이 책은 최근 서점에 쏟아져 나오는 '노무현 찬양 + 이명박 정부 비판' 네러티브의 책들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이유도 없이 그저 이미지에 따라 한나라당을 악마로 보고 이명박을 욕하는 행위들에 대한 훌륭한 답안지가 되어준다. 조선일보의 시기별 변화와, 어떤 면에서 '악랄한 점'들이 존재했는지 분석해내는 것도 물론이고, 조중동의 실제 이해관계는 물론, 주요 선거 때마다의 지면 분석을 통해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를 극렬하게 까는 짓도 서슴지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결코 잘 팔리지 않을 것이다. 조중동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이미지'상으로만 싫어하긴 했지만 객관적인 근거를 내놓으라고 할 때마다 쩔쩔매던 (이른바) 좌빨들이 '훌륭한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해서, 그들과 관계한 유통사와 채널에서 이 책의 흥행을 최대한 막을 것이다.. <한겨레>와 <오마이뉴스>역시 이 책의 발간을 반기기는 할 것이나 동시에 자신들의 죄명(!)들을 명백하게 적어낸 이 책을 '밀어줄'리 만무하다. 

냉소적 회의주의의 입장의 작가가 적어낸 이 책은 누구의 빽도 없으며, 밀어줄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광고나 홍보, 혹은 베스트 셀러란에서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한국 현대 정치사를 객관적이고 명백하게 정리한 <안티조선 운동사>는 그 자체로는 이 씬에서 나올 수 없는 '현대의 classic' 정도의 수준에 다다랐다. 하지만 노무현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지금 중요한 상황을 망치고 있다면서 거부할 것이고,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 두려움을 느끼고 일단 이것이 이슈화되는 것을 차단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늘 요구하는 '공정성' , '객관성'은 하나의 텍스트로 완성되었지만 그것이 널리 이야기되고 즐겁게 보면서 토론할 수 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보인다. 때문에 어떻게라도 찾아서 <안티조선 운동기>를 구하고 이야기거리로서 사랑하는 이들과 이 내용들을 대화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공교육의 결핍을 완벽히 보충해내는 '진짜 공부'가 될 것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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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는 꽤 똑똑하다. 한국 사람들 대다수가 아직도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것을 깨닫고는 오래전 부터 지속적인 이미지 전략을 실행중이다. 중장년층에게 이 전략은 200% 효과적이며, 매번 선거 때 마다 같은 방식으로 훌륭한 성공률(!)을 기록한 결과 한나라당의 입지는 변함이 없다. 지방선거를 앞둔 2010년 5월에도 이 패턴은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어느 정도는 그들의 전략이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젊은 세대들로 갈수록 그들의 이미지 전략에 넘어가지 않는 비율이 점차 많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한국의 보수미디어는 과연 그들의 체제를 재생산해낼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쉽게 말해서, 그들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미지 전략’으로 성공적인 미디어 단층을 마련한 것이 과연 미래에도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안한 미래’에 대한 방어책으로 대형언론사들이 선택한 방패가 ‘미디어 법’이다. 한나라당이 이러한 대형언론사들에 등에 밀려(혹은 손을 잡고) 강력한 입법을 추진한 것은 자명해 보인다.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조선일보는 좌파를 죽이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좌파를 만들어 내는 일에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선일보=한나라당 기관지’라는 공식은 사실 유효하지 않다. 그들은 그저 돈과 권력을 많이 가진 대한민국의 강력한 기관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모든 불순세력(!)들이 죽어버리면 그들은 존재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오늘도 한 승려를 좌파로 만들고, 전교조를 김일성 찬양 빨갱이로, 야당을 친북정당으로 만드는 시도를 계속한다. 이렇듯 그들의 존재는 어떤 고유한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좌파에 대한 반대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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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아 2010년 3월호에서 편집부가 한 정신병리학자를 초청해 촛불시위에 대해 ‘비이성적인 집단 광기’라는 분석을 내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귀 틀어막고 2년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신동아의 한계를 보며 피식하고 웃어넘겼는데, 이번엔 조선일보다. 역시 선거를 앞두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최근 조선일보가 지속적으로 촛불시위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며 나름대로 ‘실체를 공개한다!’고 선언했지만 사실 2년 전의 내용들과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조선일보가 내린 촛불시위에 대한 분석은 가령 이런식이다. 촛불시위는 마치 사춘기 때의 돌발적인 행동으로서 이성이 없는 질풍노도의 순간 정도로 넘기려는 시도이다. 그들의 판타지는 촛불시위를 잠깐의 ‘일탈’로 규정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선일보와 극단우익세력들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촛불집회에 70만명이 모이고, 하나의 커다란 사회적 조류를 형성한 것은 설명해주지 못한다.

 조선일보는 ‘좌파세력의 선동에 속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조선일보가 말하는 ‘좌파’들은 어떠한 채널도 가지지 못한 힘 약한 비주류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보수적인 공중파가 그 불순세력에게 우호적일리 없고, 보수언론들이 미디어시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시민들을 선동할 어떠한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다함께의 ‘이명박은 독재자다!’ 찌라시를 보고 촛불시위에 수십만명이 참가하고 국민 대부분이 지지를 보냈다고 보는 것은 사실 넌센스다. 게다가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동권을 혐오했다. 한 번이라도 촛불시위 현장에 와 본 사람들이라면 참여자들이 다함께와 같은 운동권이 확성기를 들고 앞에 서기라도 하면 곧장 야유를 보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촛불집회를 ‘386운동권의 종말’로 보는 시각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촛불집회에 대해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합리적이었으나 불순세력의 개입 이후 변질되었다’라는 애매한 판단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 불순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민노총이나 진보신당, 민노당은 촛불시위 초기부터 있었으며 불순세력이라고 불리는 일당(!)들의 몇 번의 시위지도 시도는 번번히 야유로 무산되었다. 촛불시위의 흐름은 ‘자발성’이라는 일련의 토대위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팩트와 감성 사이에서

 조선일보는 지긋지긋하게 '광우병은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 발병 가능성이 사실상 0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몇 년째 조중동이 주장하는 ‘광우병이 일어날 확률은 로또 당첨되고+벼락맞을 확률’이 실제로 어느 과학적 텍스트나 논문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글이 길어지지 않기 위해 아래 링크를 참조)
http://blog.naver.com/nuskool/80052336200 
 - 괴담보다 무서운 괴담, 40만분의 1?
http://play.mgoon.com/Video/V1550939/
http://play.mgoon.com/Video/V1550938/
http://ardownload.adobe.com/pub/adobe/reader/win/8.x/8.1.2/kor/AdbeRdr812_ko_KR.exe
 -
 2008년 5월 광우병의 실제 위험 가능성에 대한 서울대 수의학과 우희종 박사의 강연과 그에 사용된 PPT 


  2007년만 하더라도 광우병 위험 알리기에 적극 나서며 노무현 정부의 외교를 비판했던 조선일보는, 2008년에는 ‘미국소고기는 안전하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제는 모두가 파악한 이러한 ‘말 바꾸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떻게든 노무현+진보+좌파 세력을(이렇게 한 세트로 묶는 것도 참 어처구니 없지만) 트집잡으려는 시도’를 넘어 ‘조선일보를 중심에 둔 한국 기득사회의 이해관계’의 거대한 지도이다.

 노무현 정부가 처음 미국과의 FTA를 추진할 때 조중동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당시 대학 면접 준비를 한다며 조선일보의 사설들과 경제면을 탐독했던 나는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그 텍스트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몇 주 지나지 않아 갑자기 조중동은 FTA를 급찬성하는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단 노무현이 저질러 놓은 일이니 반대는 했으나, 자세히 알고보니 FTA를 통해 대형 기업들을 비롯한 일종의 대형 오너들에게는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금새 FTA에 대한 비평을 변경했다.

  어쨌든, 이러한 조선일보의 기사들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는 사람들의 바라는 바는 ‘나라를 말아먹는 좌파들이 몰락하고 천년왕국이 도래하는 것’이지만 1)좌파들은 나라를 말아먹을만한 힘도 없고, 2) 그들이 원하는 대로 좌파가 멸망하더라도 그들의 꿈꾸는 왕국이 도래하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 보인다. 평소에는 사회 개혁 세력들에게 ‘무능한 좌파’들이라는 딱지를 붙어대다가, 촛불시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에서 조선일보는 그 무능한 빨갱이들을 엄청난 파워로 언론을 장악하고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신시킨다

도망치기 담론

  우리는 어떤 딜레마에 부딪쳤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심리적으로 도망치기 일쑤이다. 알코올 중독자를 남편으로 둔 가정에서는, 그에게 정신과 상담이나 재활치료를 권하는 것 보다는 ‘술만 먹을 때만 그런 거야’라고 오히려 옹호하거나, 매일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지 않을 뿐인 경우가 많다.(우리 집도 그랬으니) 시험을 못 봐 스트레스를 늘 받는 하위권 학생은 공부에 대한 의지를 태우는 것 보다, 컴퓨터 게임으로 도피한다. 그리고는 곧 ‘학습된 무기력증’에 빠진다.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태도들도 같은 맥락이다.

  촛불시위를 인정하고 그것에 일종에 정체성을 부여하게 되면, 한국 사회 체계에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때문에 촛불시위를 비정상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어떻게든 깎아내려 도피하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건전하고 멋진 중간층의 신세계’인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이들에게 촛불시위는 그야말로 호환 마마 보다도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문제에서 도망치는 것은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거나 똑바로 바라보기 불편하다고 하다고 눈과 귀를 꽉 막고 욕을 해대는 짓은 곧 제 얼굴의 침 뱉기이다.

  광우병 논란과 촛불시위를 꿰뚫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패러다임의 문제이다. 예컨대, 멜라민 과자 몇 박스 먹는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구제역에 걸린 가축을 좀 먹었다고 해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멸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멜라민 파동 때 행정부의 수반이 ‘멜라닌 과자 몇 박스 먹는다고 사람이 죽나? 괜히 중국이랑 관계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조용하라’고 공석에서 말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전근대성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것들은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오고 있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 전근대성의 반복을 보면서 우리는 주기로 찾아오는 데자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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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론과 쌍용차 너머에 있는 것들

한윤형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90년대의 문화적 조류에서 사춘기를 보낸 사람이다. 자유주의적 주체, 냉소주의적 주체에, 세상을 ‘노동자’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경영의 논리로 생각하는게 더 익숙한 사람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같은 놈이 ‘좌파’라고 불리게 된 이놈의 세상과 시대가 진짜로 웃기고 자빠졌다고 내내 생각해 왔다. 지금까지 그런 말을 굳이 안 한 것은, 호칭이야 부르는 놈들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나는 좌파가 아니야!!!”라고 외치는 게 ‘진짜 좌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런 말을 서두에 꺼낸 건 세대론과 쌍용자동차 투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고지하기 위함이다.


‘88만원 세대론’이란 게 한국 사회에 폭풍의 떡밥처럼 투척된 지도 어언 3년이 흘렀다. 젊은이들의 대다수가 88만원을 받고 살게 될 거라는 묵시론의 예언에 맞서 조선일보는 우리의 젊은 글로벌 세대들이 세계를 제패할 것이라는 ‘G세대론’을 내세웠다. 그러는 사이 3-40대들은 20대가 투표를 안 해서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개탄했고 20대들은 사회를 이렇게 만든 게 모두 당신들인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버럭 성질을 냈다. 세대론이 계급문제를 은폐하고 우익들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담론이라는 좌파들의 개탄이 있었고, 세대불평등이 통계자료에 유의미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어느 사회학자의 타당한 지적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취업 컨설턴트들은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환기시키기 위해 ‘88만원 세대론’을 써먹었고 당사자 운동이란 걸 만들어보려는 극소수의 20대들은 암중모색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다.  


‘88만원 세대론’의 본질을 무어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담론이 애초부터 중간계급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 담론의 시선은 ‘원래부터 88만원 정도를 벌었던 젊은이들’에게 가 있지 않다. 그 시선은 저 묵시론적 예언을 듣고 ‘혹시 나도 88만원 정도를 벌게 될지도 모른다고 불안감을 느끼게 된 젊은이들’을 향한다. 그런 젊은이들의 불안감이 <88만원 세대>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그 불안감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온전히 대변하지 않으며, 더구나 ‘미래’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러므로 ‘세대불평등’이란 것이 통계자료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이들의 불안감이 폭로하는 사회문제는 어떤 진보적인 가치지향에서 잡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면서, 그렇게 해서 훼손된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그들 중산층의 자녀조차 자신의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신나게 날다가 되돌아와 던진 사람의 뒷통수를 치는 부메랑이다.


어찌 이 문제만이겠는가.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을 때 경악스러운 이유는 삼성의 부도덕성이나 뻔뻔스러움 때문만은 아니다. 냉소주의와 경영논리에 찌든 눈은 다른 지점을 바라본다. 삼성이란 조직이 운용되는 방식이 이 기업의 지속적인 생존가능성에 대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가 걸리는 것이다. 이건희는 이미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아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복귀했다. 삼성이 위기라는 이건희의 주장은 경제신문들의 ‘건비어천가’가 아니더라도 옳다. 하지만 이건희라고 해서 영원히 살 수 있단 말인가. 핸드폰을 애플보다 열 배는 더 많이 팔면서도 수익은 그만큼 올리지 못하는 삼성, 비자금 관리자를 기술개발자보다 우대하는 삼성의 경영방식은 가격경쟁력을 위한 노동자의 희생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저임금 노동자에 길들여진 이 ‘초일류기업’이 노동자를 백혈병으로 죽이면서 세계를 호령하는 일은 얼마나 더 가능할까. 한국의 지배계급이 정말로 ‘삼성의 몰락=대한민국의 멸망’이란 등식을 믿는다면 지금은 ‘지속가능한 삼성’을 위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저 재벌총수를 설득할 때다. 하지만 소위 ‘보수진영’에선 이건희를 비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국 자본주의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대문제의 핵심이다. 한국경제를 주도하는 장년세대는 자신들이 이룩한 산업화의 성과에 뿌듯함을 느끼며, 자식세대가 그것을 무한히 존경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현실은 그네들의 자녀들이 자식가지는 것을 꿈꾸지 못하는 ‘출산파업’의 현실이다. 이 현실에 맞닥트린 지배계급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연하기 위해 ‘낙태 반대’ 캠페인을 벌인다. 부모세대가 만들어온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이런 추세대로라면 몇 십 년 안에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대한민국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선 누군가 문제를 직시해야 하지만 뱀은 우물 바깥을 보지 않고 빙그르르 돌아서 자기 꼬리를 문다. 탐욕스러운 뱀은 날카로운 이빨로 자신의 꼬리를 잘라내어 집어삼킨다.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란 뱀의 꼬리였다. 정규직 노동자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외면하고 사회문제를 외면하면 자신들만은 살 줄 알았던 그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해고됐다. 이들의 투쟁을 외면하면 우리는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노동자들을 잘라내고 기업의 안녕을 도모하는 기업들은 그렇게 ‘제 살 깎아먹기’에 몰두하다가 나중에 물건은 누구에게 팔아먹을 생각일까?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오로지 수출만으로 먹고 살면서, 제 나라 노동자들을 끝없이 착취할 자신이 있는 걸까? 박리다매로 글로벌 기업이 된 위대한 삼성조차 100% 내수인 금융으로 수조원의 이익을 내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말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미래를 모르는 탐욕스러운 뱀의 꼬리에 위치했다면, 88만원 세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서 대한민국의 현실이 드러날 게다. 88만원 세대가 쌍용자동차 투쟁과 만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쌍용의 노동자들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애저녁에 포기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용안정을 보장받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은 젊은이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에 다니는 젊은이들 중 대다수가 돈이 조금 모이면 그 기업에서 나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을 꿈꾼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정년까지 일하리란 꿈을 꾸지 못한다. 안 그래도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한국 사회에 이 친구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좌파만의 의무’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좌파’라는 힐난을 듣게 된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소리를 듣는다. “좌파는 성선설(性善說)을 믿으니 문제”라던 사람들이 한편으로 말하는 것이 저 ‘따뜻한 마음’이다. 사실 내 안에서 그런 반응에 조소하는 큰 부분은 좌파적 감수성이기는커녕 냉소주의와 경영의 논리다. 국방력 강화에 큰 관심이 있었던 전직 대통령은 북한 땅을 중국에 갖다 바치려는 수준의 철딱서니없는 ‘보수’들에게 ‘좌파’로 매도당했는데, 사실 그는 ‘노동자’의 시선을 보여주기는커녕 쌍용차에 투자하겠다는 상하이차 자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자본가의 ‘선량한 마음’을 신뢰했다. 쌍용차의 현재 상황에 치를 떠는 감수성 역시 생활터전을 뺏긴 노동자를 챙긴다는 진보의 논리 이전에 ‘매각’을 잘못한 경영진의 ‘착한 마음’에 대한 냉소에서 나온다. 그 선량한 사람들의 순진한 행동 속에서, 일자리를 뺏긴 사람들은 ‘악’이 받칠 수밖에 없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뺏긴 것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이 처음부터 가지고자 욕망하지도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 것을 욕망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배운 젊은이들은 월급이 적어도 안정성을 찾기 위해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맨다. 공무원 따위(?)가 최고 인기직종인 사회는 조선일보도 우려하고 진중권도 조소한다. 대학 진학률이 높아서 문제라는 얘기는 이명박 대통령도 하고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도 한다. 문제는 그렇게 뻔하게 있는데, ‘이기적 개인들의 선택’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사회정책을 입안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미약하다. 체제는 스스로 변하지는 않을 거다. 뺏기기 시작한 사람들은 계속 뺏길 것이고 욕망을 거세당한 이들은 그 룰 속에서 아둥바둥 뛰어갈 것이다.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가? 누구들이 힘을 합쳐야 이런 문제를 끝낼 수 있나? 세대론이 옳으냐 계급론이 옳으냐와 같은 문제제기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어떻게’에 대한 이러한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뾰족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현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출발점이다. 세대담론은 물질적으로나, 담론적으로나, 계급문제가 철저하게 정치에서 배제된 결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담론이다. 그리하여 ‘계급의 문제’를 넘어서기에 더 쉬운 연대가 가능할 거라고 역설하지만, 실은 노동계급이 얼마나 가진 것이 없는지를, 그들의 투쟁의 출발선이 얼마나 뒤로 물려져 있고 그래서 얼마나 무력한 지를 폭로하는 담론이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거세당한 욕망을 권리로 인지하고, 그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세상은 지금으로선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다. 그렇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고립’은 투쟁의 성공이 아니라 투쟁 자체가 꿈이 되어버린 세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꼬리를 씹어먹은 뱀의 머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신체를 잠식할 것이다. 미래는 없지만, 그들에게 다른 방법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불행해지더라도 지금까지 그랬듯 우리모두 아등바등 살면서 뱀 머리의 특권을 유지시켜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모든 이가 공평하게 욕망을 거세당한 사회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런 결말을 피하고 싶다면 우리가 포기한 부분들, 우리의 몸에서 잘려나간 부분들을 응시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쌍용자동차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며, 문제를 대면하고서야 투쟁에 나서는 습속을 반복할 때, 노동운동과 젊은이들은 영영 서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둘 다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 출처 : yhhan.tistory.com - How many cuts should I repeat?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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