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리크스와 SNS 사이에서

  질문은 다시 이렇게 정리가 가능하다.'구매체는 이 흐름에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매우 간단하게도 기본적인 개념의 '정론지'가 되는 것이다. 신매체들은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고, 개방성과 상호작용성을 지닌다. 이것은 그들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동시에 치명적인 결점이기도 하다. 다양한 정보가 필터링 없이 범람하여 질은 보장되지 못하며, 직접 눈으로 앞에 존재하는 인쇄된 출판물이 아니기 때문에 수용자는 가볍게 그것을 넘기기 쉽다. 예컨대, 조회 수가 높은 기사에는 필연적으로 리플이나 트랙백과 같은 피드백의 기능을 통해 추가의 의견이 개입된다. 그리고 이것은 수용자로 하여금 기사 자체의 텍스트와 함께 또 다른 의미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은 구매체가 인터넷 매체 보다 더 깊이 있는 담론을 생산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인터넷 블로그의 글들을 열독하는 대신 책을 구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범위를 어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인터넷에는 다양한 정보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는 '파편화'되어 있다. 때문에, 이를 하나의 유기적인 담론으로 재구성해 낸 체계화된 책이나 지면신문과 같은 매체가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정보의 신속성이나 흥미성은 충족이 되었지만 그에 따라 오히려 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담론을 찾기 힘들어진 까닭이다. 신문의 경쟁력은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돈을 주고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매체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들은 새로운 대응방식을 모색하기 보다는 점점 무협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반면 SNS나 위키리크스 같은 현재 가장 뜨거운 매체들은 점점 정치와 사회 경제에 치명적인 플랫폼이 되고 있다. 만약 한국의 신문들이 지금과 같은 갈등적 구도와 과잉적 수사에만 치중할 경우 구매체의 가치는 가까운 미래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스포츠 신문의 연예면이나 다를 바 없는 정치 기사들에게서 그 어떠한 '정통성'이나 '권위'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은 흥미가 떨어지고 생소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돈을 내고 구입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프랑스의 <르 몽드>나 영국의 <가디언>을 '이 언론의 논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돈을 내고 구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권력과 자본에 독립적인, 공신력 있는 정론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거리에만 치중한 무협지와 같은 기사들이 지양되어야 할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정론지' 형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명감이나 언론윤리와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가까운 미래에 살아남기 위한 존속의 문제이다.


-ps 그럼에도 여전히 대안은 모호하고 애매하다 : 그런 언론을 정말 사람들이 바라기는 하는 걸까? 그런 언론이 등장한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고 구입할까? 이 질문에는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권력과 자본으로 부터 독립적이며, 다수의 대중들이 인정하는 - 정론지를 가져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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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은 늘 곤혹스럽다. 왜 정치얘기만 나오면 결국 멱살을 잡고 싸우고 마는 것일까. 추석 때 마다 벌어지는 노사모인 삼촌과 박정희 찬양자인 할아버지의 다툼 사이에서 나는 늘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아버지는 우리 가족만큼은 절대 정치 얘기를 하지 말자고 합의를 보았다. 명절 날 친척들 사이의 '소통'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무림 고수들 간의 대결

  현재 한국 신문들의 정치 기사는 삼국지 인물들의 세력다툼이나 무협지의 서사와 너무도 유사하다. 특히 정당정치를 다룬 기사들은 제목 뿐 아니라 내용까지도 마치 삼국지의 번외편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제도권 정치에 조직 간의 알력이나 인물들 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러한 이슈들은 정당정치에 있어서 주변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주요 인물들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자극적인 기사들이 올라오는 이유는 제도권 정치 내에 어떠한 이슈, 시의성 있는 사건을 다룬 기사에 비해 훨씬 잘 팔리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를 구성하는 문체는 더욱 무협지와 유사하다. 세련되지 못할 뿐 더러 인물 중심의 갈등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과잉적으로 사용된다. 사건을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으로 풀이해주는 대신 '00파, 종북좌익, 결집, 격돌, 승부처' 등 화려한 수사만 가득한 상황이다. 이는 갈등적 서사와 더불어 기사가 내포하고 있는 상황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준다. 이처럼 인물들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서사와 과잉적 수사가 현재 한국 매체의 정치기사들의 현실이다.

  문제는 대중들이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제도권 정치를 계파간의 투쟁이나 영웅들의 서사시처럼 단순화 시켜버리는 것이다. ‘수사적 단순화'를 통해 복잡한 정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실제는 정반대이다. 수용자들은 구체적인 사실 대신 수사적 문구들만을 기억하게 된다. 24시간 뉴스를 청취하며 생활하는 택시기사들의 정치적 담론이 종종 비난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뉴스와 일간지의 정치기사들을 보며 한국 정치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읽는 것들은 속이 텅 빈 '레토릭' 덩어리에 불과한 셈이다. 결국 이를 수용한 대중들은 정치를 대결식 구도와 과잉적 수사로만 인식하게 된다. 흥미를 자극해 가십을 만드는 이러한 주류언론의 태도는 사회를 천박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진보'과 '보수'를 양 축으로 한 한국인의 이분법적인 정치 프레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적 토론이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데 언론들이 강한 원인 제공을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신문들은 상업주의를 극복하기는커녕 그 구조에 순응하여, 언론을 더 좋은 수익사업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단순히 '언론윤리를 배반한 타락한 언론들!'하고 비난만 한다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해 혹자는 '언론이 각성하면 된다.'는 식의 해답을 내놓지만, 이는 자본이라는 상부구조를 경시한 허무한 외침이다. 정치 기사의 가십화는 언론도 수익을 내야한다는 기업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판매부수는 광고수입과 직결되고, 때문에 구독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내야 한다. 고객의 시선을 끌 수 있도록 정치 뉴스는 과잉적 수사로 포장된다. 최근 포털사이트가 온라인에서 가판대 역할을 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 결과 주류언론의 정치 기사가 스포츠 신문의 연예면과 다를 바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구독률 전쟁 때문에, 연간 구독료보다 많은 상품을 제공하고 고객 모집 전쟁을 펼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런 자극적인 구성이 단기적으로는 수익을 올려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살 행위와 다름 없다. 스스로 경쟁력을 깎아 내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 언론이 무협지를 쓰고 있을 때 위키리크스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매체가 어떤 파급력과 내용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지 지속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해킹이나 불법적 방법이 아닌 내부 고발자들의 자발적인 정보 제공을 통해 새로운 판을 개척한 것이다. 대표적인 SNS인 트위터는 140자라는 제한으로 인해 간단한 형식에 많은 내용을 압축해낸다. 동시에 팔로우(Follow)와 리트윗(Retweet)이라는 기능을 통해 온라인상에서 그 영향력은 더욱 강력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과연 한국의 신문들이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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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론과 쌍용차 너머에 있는 것들

한윤형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90년대의 문화적 조류에서 사춘기를 보낸 사람이다. 자유주의적 주체, 냉소주의적 주체에, 세상을 ‘노동자’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경영의 논리로 생각하는게 더 익숙한 사람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같은 놈이 ‘좌파’라고 불리게 된 이놈의 세상과 시대가 진짜로 웃기고 자빠졌다고 내내 생각해 왔다. 지금까지 그런 말을 굳이 안 한 것은, 호칭이야 부르는 놈들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나는 좌파가 아니야!!!”라고 외치는 게 ‘진짜 좌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런 말을 서두에 꺼낸 건 세대론과 쌍용자동차 투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고지하기 위함이다.


‘88만원 세대론’이란 게 한국 사회에 폭풍의 떡밥처럼 투척된 지도 어언 3년이 흘렀다. 젊은이들의 대다수가 88만원을 받고 살게 될 거라는 묵시론의 예언에 맞서 조선일보는 우리의 젊은 글로벌 세대들이 세계를 제패할 것이라는 ‘G세대론’을 내세웠다. 그러는 사이 3-40대들은 20대가 투표를 안 해서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개탄했고 20대들은 사회를 이렇게 만든 게 모두 당신들인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버럭 성질을 냈다. 세대론이 계급문제를 은폐하고 우익들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담론이라는 좌파들의 개탄이 있었고, 세대불평등이 통계자료에 유의미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어느 사회학자의 타당한 지적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취업 컨설턴트들은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환기시키기 위해 ‘88만원 세대론’을 써먹었고 당사자 운동이란 걸 만들어보려는 극소수의 20대들은 암중모색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다.  


‘88만원 세대론’의 본질을 무어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담론이 애초부터 중간계급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 담론의 시선은 ‘원래부터 88만원 정도를 벌었던 젊은이들’에게 가 있지 않다. 그 시선은 저 묵시론적 예언을 듣고 ‘혹시 나도 88만원 정도를 벌게 될지도 모른다고 불안감을 느끼게 된 젊은이들’을 향한다. 그런 젊은이들의 불안감이 <88만원 세대>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그 불안감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온전히 대변하지 않으며, 더구나 ‘미래’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러므로 ‘세대불평등’이란 것이 통계자료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이들의 불안감이 폭로하는 사회문제는 어떤 진보적인 가치지향에서 잡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면서, 그렇게 해서 훼손된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그들 중산층의 자녀조차 자신의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신나게 날다가 되돌아와 던진 사람의 뒷통수를 치는 부메랑이다.


어찌 이 문제만이겠는가.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을 때 경악스러운 이유는 삼성의 부도덕성이나 뻔뻔스러움 때문만은 아니다. 냉소주의와 경영논리에 찌든 눈은 다른 지점을 바라본다. 삼성이란 조직이 운용되는 방식이 이 기업의 지속적인 생존가능성에 대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가 걸리는 것이다. 이건희는 이미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아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복귀했다. 삼성이 위기라는 이건희의 주장은 경제신문들의 ‘건비어천가’가 아니더라도 옳다. 하지만 이건희라고 해서 영원히 살 수 있단 말인가. 핸드폰을 애플보다 열 배는 더 많이 팔면서도 수익은 그만큼 올리지 못하는 삼성, 비자금 관리자를 기술개발자보다 우대하는 삼성의 경영방식은 가격경쟁력을 위한 노동자의 희생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저임금 노동자에 길들여진 이 ‘초일류기업’이 노동자를 백혈병으로 죽이면서 세계를 호령하는 일은 얼마나 더 가능할까. 한국의 지배계급이 정말로 ‘삼성의 몰락=대한민국의 멸망’이란 등식을 믿는다면 지금은 ‘지속가능한 삼성’을 위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저 재벌총수를 설득할 때다. 하지만 소위 ‘보수진영’에선 이건희를 비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국 자본주의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대문제의 핵심이다. 한국경제를 주도하는 장년세대는 자신들이 이룩한 산업화의 성과에 뿌듯함을 느끼며, 자식세대가 그것을 무한히 존경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현실은 그네들의 자녀들이 자식가지는 것을 꿈꾸지 못하는 ‘출산파업’의 현실이다. 이 현실에 맞닥트린 지배계급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연하기 위해 ‘낙태 반대’ 캠페인을 벌인다. 부모세대가 만들어온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이런 추세대로라면 몇 십 년 안에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대한민국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선 누군가 문제를 직시해야 하지만 뱀은 우물 바깥을 보지 않고 빙그르르 돌아서 자기 꼬리를 문다. 탐욕스러운 뱀은 날카로운 이빨로 자신의 꼬리를 잘라내어 집어삼킨다.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란 뱀의 꼬리였다. 정규직 노동자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외면하고 사회문제를 외면하면 자신들만은 살 줄 알았던 그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해고됐다. 이들의 투쟁을 외면하면 우리는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노동자들을 잘라내고 기업의 안녕을 도모하는 기업들은 그렇게 ‘제 살 깎아먹기’에 몰두하다가 나중에 물건은 누구에게 팔아먹을 생각일까?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오로지 수출만으로 먹고 살면서, 제 나라 노동자들을 끝없이 착취할 자신이 있는 걸까? 박리다매로 글로벌 기업이 된 위대한 삼성조차 100% 내수인 금융으로 수조원의 이익을 내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말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미래를 모르는 탐욕스러운 뱀의 꼬리에 위치했다면, 88만원 세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서 대한민국의 현실이 드러날 게다. 88만원 세대가 쌍용자동차 투쟁과 만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쌍용의 노동자들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애저녁에 포기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용안정을 보장받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은 젊은이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에 다니는 젊은이들 중 대다수가 돈이 조금 모이면 그 기업에서 나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을 꿈꾼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정년까지 일하리란 꿈을 꾸지 못한다. 안 그래도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한국 사회에 이 친구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좌파만의 의무’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좌파’라는 힐난을 듣게 된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소리를 듣는다. “좌파는 성선설(性善說)을 믿으니 문제”라던 사람들이 한편으로 말하는 것이 저 ‘따뜻한 마음’이다. 사실 내 안에서 그런 반응에 조소하는 큰 부분은 좌파적 감수성이기는커녕 냉소주의와 경영의 논리다. 국방력 강화에 큰 관심이 있었던 전직 대통령은 북한 땅을 중국에 갖다 바치려는 수준의 철딱서니없는 ‘보수’들에게 ‘좌파’로 매도당했는데, 사실 그는 ‘노동자’의 시선을 보여주기는커녕 쌍용차에 투자하겠다는 상하이차 자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자본가의 ‘선량한 마음’을 신뢰했다. 쌍용차의 현재 상황에 치를 떠는 감수성 역시 생활터전을 뺏긴 노동자를 챙긴다는 진보의 논리 이전에 ‘매각’을 잘못한 경영진의 ‘착한 마음’에 대한 냉소에서 나온다. 그 선량한 사람들의 순진한 행동 속에서, 일자리를 뺏긴 사람들은 ‘악’이 받칠 수밖에 없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뺏긴 것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이 처음부터 가지고자 욕망하지도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 것을 욕망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배운 젊은이들은 월급이 적어도 안정성을 찾기 위해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맨다. 공무원 따위(?)가 최고 인기직종인 사회는 조선일보도 우려하고 진중권도 조소한다. 대학 진학률이 높아서 문제라는 얘기는 이명박 대통령도 하고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도 한다. 문제는 그렇게 뻔하게 있는데, ‘이기적 개인들의 선택’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사회정책을 입안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미약하다. 체제는 스스로 변하지는 않을 거다. 뺏기기 시작한 사람들은 계속 뺏길 것이고 욕망을 거세당한 이들은 그 룰 속에서 아둥바둥 뛰어갈 것이다.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가? 누구들이 힘을 합쳐야 이런 문제를 끝낼 수 있나? 세대론이 옳으냐 계급론이 옳으냐와 같은 문제제기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어떻게’에 대한 이러한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뾰족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현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출발점이다. 세대담론은 물질적으로나, 담론적으로나, 계급문제가 철저하게 정치에서 배제된 결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담론이다. 그리하여 ‘계급의 문제’를 넘어서기에 더 쉬운 연대가 가능할 거라고 역설하지만, 실은 노동계급이 얼마나 가진 것이 없는지를, 그들의 투쟁의 출발선이 얼마나 뒤로 물려져 있고 그래서 얼마나 무력한 지를 폭로하는 담론이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거세당한 욕망을 권리로 인지하고, 그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세상은 지금으로선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다. 그렇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고립’은 투쟁의 성공이 아니라 투쟁 자체가 꿈이 되어버린 세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꼬리를 씹어먹은 뱀의 머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신체를 잠식할 것이다. 미래는 없지만, 그들에게 다른 방법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불행해지더라도 지금까지 그랬듯 우리모두 아등바등 살면서 뱀 머리의 특권을 유지시켜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모든 이가 공평하게 욕망을 거세당한 사회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런 결말을 피하고 싶다면 우리가 포기한 부분들, 우리의 몸에서 잘려나간 부분들을 응시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쌍용자동차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며, 문제를 대면하고서야 투쟁에 나서는 습속을 반복할 때, 노동운동과 젊은이들은 영영 서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둘 다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 출처 : yhhan.tistory.com - How many cuts should I rep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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