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11.07 마음 속 리모컨의 정의란 무엇인가?
  2. 2010.05.27 조선일보와 촛불시위 판타지 1
  3. 2009.08.03 그 놈의 '폭력'시위 1



 

  2008년 촛불집회 이후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의제 중 하나가 바로 '소통'이다. 이 소통에 대한 담론들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효과적인 의사전달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제도권 정치와 시민사회가 만나는 합리적 장(場)에 대한 요청이기도 했다. 이 공익광고는 소통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뤘다는 점에서 2년 전 요구에 대한 주류사회의 하나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광고는 분쟁과 갈등을 부정적인 태도로 간주하며 그것을 '마음 속 리모컨'으로 형상화한다. 곧이어 타인의 생각을 인정하는 윤리를 강조하며 '마음의 문을 열어라'라는 요청을 한다.

  최근 몇 년 간 사회적 갈등이 경제적 위기를 자초한다거나, 시위의 폭력성이 우려된다는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놓았던 행정부와 언론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마음 속 리모컨>이 형성하는 의미는 명확해진다. 다시 말하면, <마음 속 리모컨>은 '갈등'을 해결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봉합하고 숨겨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한국 주류사회가 지니고 있는 전근대적인 사고의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전근대성은 '갈등은 나쁜 것'이라는 전제이다. 사실, 갈등은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한다. 특히 그 불균형의 원인이 사회의 불합리한 역학이나 현실정치에 있을 경우 발생하는 갈등은 비합리성을 개선하고 사회성 건전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굳이 갈등주의적 관점을 취하지 않더라도, 갈등은 해결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태도는 갈등의 원인이 되는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광고의 서사에서 갈등은 해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숨기고 봉합해야 할 금기이다.

  제작자가 직접 밝힌 <마음 속 리모컨>의 주제에 대한 설명은 이와 같은 측면을 더욱 부각시켜준다. 제작자인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가 직접 '사회공동체-벽 허물기(소통을 통한 사회통합)'가 주제라고 밝히고 있는 이 광고에 '관용과 배려를 바탕으로 사회통합을 이루지 않고서는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설명도 추가로 덧붙이고 있다. 비단 강정 해군기지 논란뿐만 아니라, 한진중공업이나 무상급식 논쟁과 같은 일련의 사회적 논쟁에서 등장하는 '사회통합'과 '갈등 봉합' 표현이 함의를 감안할 때, 위 설명은 갈등에 대한 주류사회의 정서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국민총화'와 같은 레토릭까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갈등은 해결이 아니라 나타나서는 최대한 빨리 사라져야할 안 되는 불합리한 상황으로 인식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인식이 정치공학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광고가 의도하는 바는 더욱 뚜렷해진다.


<마음 속 리모컨>의 레토릭

  마음 속 리모컨을 끌 것을 요구하는 나레이션과 함께 화면 가득히 '대한민국 사회갈등 비용 연간 300조원' 텍스트가 등장한다. '사회갈등 비용 300조원'이라는 문장은 최근 정치인의 강연이나 인터뷰, 신문기사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사회갈등 비용 300조'는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한국의 사회갈등과 경제적 비용’ 이라는 보고서에 포함된 내용이다. 회원국이 돌아가며 개최하는 회의인 20개국(G20) 정상회의의 경제효과를 최대 24조원으로 추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혹자는 수치의 과장을 의심한다. 특히 이 보고서가 참여정부의 참여민주주의를 실패로 결론 내렸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그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이 조사의 방법론과 신뢰성에 대한 판단은 이 분야 전문가의 영역이다.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는 그 수치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저 레토릭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억압'이다.

  최근 몇 년 간 한국 사회 발생한 사회적 대결은 사회적 약자의 실력 행사로 부터 시작되었다. 촛불시위 이후로 용산참사, 쌍용차 파업, 한진중공업과 희망버스, 명동 마리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나 비정규직, 세입자들과 같은 상대적 약자와 비교적 갑의 위치에 있는 자본과의 충돌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충돌이 빈번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한국의 정당정치가 사회적 약자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도 볼 수 있고, 법적 행동보다 항의전술이 언론의 집중을 얻어내는 데 더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법적·사회적 제도의 불합리로 인해 약자들이 극단적 행동 말고는 별다른 탈출구가 없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 원인이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소요사태가 표출되는 때, 그 상황을 유발하는 주체로 인식되는 것은 결국 사회적 약자 쪽이다. 즉, 제도적 문제나 자본의 폭력성을 지원하는 구조는 수면 밑에 머물러 있으며, 표면적으로 볼 때 사회적 갈등을 유발시키는 이들이 결국 집회나 피케팅을 하는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이다. 따라서 이 광고는 이들을 부정적으로 이미지화 시키는 데 일조한다. '사회적 갈등 300조'라는 문구가 오버랩 되는 순간 시청자들과 청취자들은 필연적으로 이슈화된 시위현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으며, 이 경제적 피해를 만드는 시위의 참여 주체들이 '사회악'으로 형상화 된다. 


샌델과 대한민국

  그렇다면 대중들은 이 광고를 어떻게 수용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2010년과 2011년에 걸쳐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은 이 교양서적은 처세술과 성공학 책들을 밀어내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세를 이루었다. 그 흐름은 지금도 이어져 손꼽히는 추천 교양서로서의 입지를 차지했다. 책과 더불어 그의 실제 강연이 녹화된 DVD가 불티난 듯 팔리고, 샌델의 국내 강연회에서도 대학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작가가 하버드 교수임을 내세운 출판사의 홍보 마케팅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 센세이션이면 뭔가 다른 요인을 찾아야 하는 게 정상이다. 

  사실, 내한 강연을 왔던 샌댈 교수는 그에게 폭발적인 관심과 열광에 의아해 했다. 그의 책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거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의견의 불일치를 받아들이고 도덕적 분쟁을 인정하는 것”을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첫 단계라고 제시한 책이었다. 이 상식적인 내용이 한국에서는 폭발적 인기라는 사실에 샌델 교수는 놀라움을 나타냈다. 동시에 그는 이에 대해 “한국 사회가 그만큼 정의를 갈구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의견 불일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공공논의의 장을 마련해 정의, 공공 선(善) 같은 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것이죠."

- 마이클 샌델, 2010년 방한 기자간담회에서

  그가 말하는 정의는 일종의 공공 선(善)이다. 이 공공 선은 모두가 합리적으로 인정할만한 보편적인 가치 이자 기준으로, 이 공공 선에 대한 합의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는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즉,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제작되는 공익광고는 공공 선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가치를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마음 속 리모컨>은 그 공공 선에 대해 판단이 작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성과 관용이라는 원래의 취지를 배반하는 결과를 낳는 자가당착에 빠져버렸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은 이러한 광고 이면의 의도가 수용자들에게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마음 속 리모컨>의 나타내는 '갈등에 대한 혐오'와 대중들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혐오'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갈등에 대한 혐오'는 '정치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사장되고, 결국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이라는 대중적 욕구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그 대중적 욕구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광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마음 속 리모컨>은 다른 공익광고와 비교해서도 수용자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고 별 다른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한 반면, <정의란 무엇인가>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마음 속 리모컨>과 같은 광고는 의견의 불일치와 갈등을 단정적으로 부정하는 '정의롭지 못한 광고'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 속 리모컨>은 그 자체로 논리적 결함을 지닌 동시에, 샌델의 책과 달리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요구를 분석해 내는 데에도 실패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의 정서가 이러한데, 타자인 샌델이 이 광고를 보았을 때 그의 반응을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시에 그는 그제야 그리 특별하지 않은 그의 책이 어째서 한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는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부터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소통'이라는 의제는 <마음 속 리모컨>이라는 광고와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 사이에서 이와 같이 재발견된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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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아 2010년 3월호에서 편집부가 한 정신병리학자를 초청해 촛불시위에 대해 ‘비이성적인 집단 광기’라는 분석을 내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귀 틀어막고 2년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신동아의 한계를 보며 피식하고 웃어넘겼는데, 이번엔 조선일보다. 역시 선거를 앞두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최근 조선일보가 지속적으로 촛불시위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며 나름대로 ‘실체를 공개한다!’고 선언했지만 사실 2년 전의 내용들과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조선일보가 내린 촛불시위에 대한 분석은 가령 이런식이다. 촛불시위는 마치 사춘기 때의 돌발적인 행동으로서 이성이 없는 질풍노도의 순간 정도로 넘기려는 시도이다. 그들의 판타지는 촛불시위를 잠깐의 ‘일탈’로 규정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선일보와 극단우익세력들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촛불집회에 70만명이 모이고, 하나의 커다란 사회적 조류를 형성한 것은 설명해주지 못한다.

 조선일보는 ‘좌파세력의 선동에 속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조선일보가 말하는 ‘좌파’들은 어떠한 채널도 가지지 못한 힘 약한 비주류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보수적인 공중파가 그 불순세력에게 우호적일리 없고, 보수언론들이 미디어시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시민들을 선동할 어떠한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다함께의 ‘이명박은 독재자다!’ 찌라시를 보고 촛불시위에 수십만명이 참가하고 국민 대부분이 지지를 보냈다고 보는 것은 사실 넌센스다. 게다가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동권을 혐오했다. 한 번이라도 촛불시위 현장에 와 본 사람들이라면 참여자들이 다함께와 같은 운동권이 확성기를 들고 앞에 서기라도 하면 곧장 야유를 보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촛불집회를 ‘386운동권의 종말’로 보는 시각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촛불집회에 대해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합리적이었으나 불순세력의 개입 이후 변질되었다’라는 애매한 판단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 불순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민노총이나 진보신당, 민노당은 촛불시위 초기부터 있었으며 불순세력이라고 불리는 일당(!)들의 몇 번의 시위지도 시도는 번번히 야유로 무산되었다. 촛불시위의 흐름은 ‘자발성’이라는 일련의 토대위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팩트와 감성 사이에서

 조선일보는 지긋지긋하게 '광우병은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 발병 가능성이 사실상 0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몇 년째 조중동이 주장하는 ‘광우병이 일어날 확률은 로또 당첨되고+벼락맞을 확률’이 실제로 어느 과학적 텍스트나 논문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글이 길어지지 않기 위해 아래 링크를 참조)
http://blog.naver.com/nuskool/80052336200 
 - 괴담보다 무서운 괴담, 40만분의 1?
http://play.mgoon.com/Video/V1550939/
http://play.mgoon.com/Video/V1550938/
http://ardownload.adobe.com/pub/adobe/reader/win/8.x/8.1.2/kor/AdbeRdr812_ko_KR.exe
 -
 2008년 5월 광우병의 실제 위험 가능성에 대한 서울대 수의학과 우희종 박사의 강연과 그에 사용된 PPT 


  2007년만 하더라도 광우병 위험 알리기에 적극 나서며 노무현 정부의 외교를 비판했던 조선일보는, 2008년에는 ‘미국소고기는 안전하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제는 모두가 파악한 이러한 ‘말 바꾸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떻게든 노무현+진보+좌파 세력을(이렇게 한 세트로 묶는 것도 참 어처구니 없지만) 트집잡으려는 시도’를 넘어 ‘조선일보를 중심에 둔 한국 기득사회의 이해관계’의 거대한 지도이다.

 노무현 정부가 처음 미국과의 FTA를 추진할 때 조중동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당시 대학 면접 준비를 한다며 조선일보의 사설들과 경제면을 탐독했던 나는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그 텍스트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몇 주 지나지 않아 갑자기 조중동은 FTA를 급찬성하는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단 노무현이 저질러 놓은 일이니 반대는 했으나, 자세히 알고보니 FTA를 통해 대형 기업들을 비롯한 일종의 대형 오너들에게는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금새 FTA에 대한 비평을 변경했다.

  어쨌든, 이러한 조선일보의 기사들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는 사람들의 바라는 바는 ‘나라를 말아먹는 좌파들이 몰락하고 천년왕국이 도래하는 것’이지만 1)좌파들은 나라를 말아먹을만한 힘도 없고, 2) 그들이 원하는 대로 좌파가 멸망하더라도 그들의 꿈꾸는 왕국이 도래하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 보인다. 평소에는 사회 개혁 세력들에게 ‘무능한 좌파’들이라는 딱지를 붙어대다가, 촛불시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에서 조선일보는 그 무능한 빨갱이들을 엄청난 파워로 언론을 장악하고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신시킨다

도망치기 담론

  우리는 어떤 딜레마에 부딪쳤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심리적으로 도망치기 일쑤이다. 알코올 중독자를 남편으로 둔 가정에서는, 그에게 정신과 상담이나 재활치료를 권하는 것 보다는 ‘술만 먹을 때만 그런 거야’라고 오히려 옹호하거나, 매일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지 않을 뿐인 경우가 많다.(우리 집도 그랬으니) 시험을 못 봐 스트레스를 늘 받는 하위권 학생은 공부에 대한 의지를 태우는 것 보다, 컴퓨터 게임으로 도피한다. 그리고는 곧 ‘학습된 무기력증’에 빠진다.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태도들도 같은 맥락이다.

  촛불시위를 인정하고 그것에 일종에 정체성을 부여하게 되면, 한국 사회 체계에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때문에 촛불시위를 비정상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어떻게든 깎아내려 도피하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건전하고 멋진 중간층의 신세계’인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이들에게 촛불시위는 그야말로 호환 마마 보다도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문제에서 도망치는 것은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거나 똑바로 바라보기 불편하다고 하다고 눈과 귀를 꽉 막고 욕을 해대는 짓은 곧 제 얼굴의 침 뱉기이다.

  광우병 논란과 촛불시위를 꿰뚫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패러다임의 문제이다. 예컨대, 멜라민 과자 몇 박스 먹는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구제역에 걸린 가축을 좀 먹었다고 해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멸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멜라민 파동 때 행정부의 수반이 ‘멜라닌 과자 몇 박스 먹는다고 사람이 죽나? 괜히 중국이랑 관계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조용하라’고 공석에서 말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전근대성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것들은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오고 있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 전근대성의 반복을 보면서 우리는 주기로 찾아오는 데자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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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국의 시위문화?

  전공수업시간중에 한국일보의 필진으로도 입지가 굳은 한 교수님이 촛불시위에 대해 평판을 내리며, '유럽에서는 경찰 패면 총살이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유럽의 시위문화에 대한 논문과 정보들을 수집하면서 동시에 영국에서 유학중인 지인에게 유럽의 시위와 한국의 시위를 비교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1. 한국시위는 폭력성은 우스운 수준이다.
2. 그에 반해 한국경찰의 진압은 기가막힐 정도이다.

 2006년 프랑스 방리유 사태와 같은 극단적인 시위의 경우에는 경찰을 불구덩이에 집어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경찰은 발포를 하거나, 시위자를 죽이지는 않는다. 다만 그 놈들을 두들겨 패서 체포할 뿐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시나병 하나 들고 자갈을 던졌다고 6명을 죽였다. 그래놓고는 '폭력시위를 했으니 당연한 결과'라는 담론이 조성된다. 

 시위를 하면서 경찰들을 심하게 다치게 하고, 주변 상점들을 초토화 시키는 일이 빈번함에도 유럽의 국가들은 매번 시위의 자유성을 보장한다. 낮이든 밤이든 시위를 할 수 있으며, 예상되는 격렬성에 상관없이 집회가 허가된다. 이것은 비단 방리유 사태 뿐만 아니라 수십년 째 이어져 온 통례이다. 보통 규모의 소요 사태에도 방화와 도난, 약탈등이 발생하는 것이 일상인 것이다.

 80년대 영국 파업에서는 늘 쇠파이프와 몽둥이가 등장했다. 서유럽에서는 우리가 보기엔 별거 아닌 것으로 시위를 하면서도, 늘 바리케이트를 치고 불을 지른다. G20 summit 때에도 이런 폭력성은 계속되었다. 차를 가지고 와서 은행의 벽을 박살내기도 하며, 산별노조들의 파업에서는 늘 거리의 유리창이 수십개씩 박살난다. 신기한 것은 그 때마다 유럽경찰은 시민을 보호하는 동시에 시위자도 보호하는 포지션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촛불집회는 같은 소요사태임에도 방화나 약탈이 단 한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공권력은 강력한 노조 시위도 아닌, 비교적 낮은 정도의 과격성에도 불구하고 물대포와 연행진압을 한다. 이것도 문제지만 정작 문제의 본질은 '그런 폭력진압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태도의 비합리성과 전근대성에 있다.(촛불시위를 '폭동'이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메이저 외국 언론매체에 가서 외국의 폭동 영상 한 번 봤으면 한다. 입이 진짜 쩌~억 벌어질 걸.) '시위를 허용하는 게 권리고 민주주의라고? 에라 그럼 폭도들이 다 나라 말아먹으라고?' 수준의 담론은 정반대의 극단적 담론-'이명박은 경찰들을 시켜서 곧 발포할 것이다'라고 예측한 네이버 댓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극단적인 상황을 '창조'해서 상대방을 깎아내리려는 시도는 별로 논리적이지도 않고 유용하지도 않다. 

 인식의 '전근대성'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이 시위의 폭력성을 국가적 창피라고 생각하는 전근대성에 있다. 유럽에서는 데모가 빈번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개쪽이다' '나라망신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그 시위를 자유롭게 보장하는 '피곤한 민주주의'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몇 명이 쇠파이프 가지고 경찰버스를 부순 것을 가지고 '10만명이 폭력시위를 한다' '광란의 광화문'이라는 담론이 조성된다. 물론, 폭력이 아예 없었으면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트병 몇 개 던진 것에 대응하여 방패로 여고생 머리를 찍어버린 태도를 보고 자연스럽게 시위는 과격해졌다. 이어 공권력의 비정상적 수행에 대한 논의없이, 극단보수언론들을 통해 촛불시위=폭력시위 라는 프레임이 형성되어 버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유럽에서 경찰패면 총살한다'는 구호는 100% 거짓말이다. 출처도 알 수 없는 불분명한 정보를 가지고 공공연하게 담론을 펼치는 교수님의 태도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의 태도는 한국의 인텔리가 어떠한 사회과학적 현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전근대의 프레임으로 단편적인 분석을 내놓는다는 것을 나타낸 셈이었다.  

 촛불시위를 어떤 외신도 '쪽팔리고 창피한 운동권들의 광기'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집단광기라는 이름표를 붙여 평가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보수 미디어는 아직도 촛불시위가 '아주 쪽팔린 일'이라고 자평한다. 하지만 우리가 창피하게 여겨할 것은 유럽애들이 보기에 우스운 수준의 일부 폭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시위 혹은 더 큰 폭력에 대항하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적 폭력이 아니라, 70년대 후진국 수준의 진압을 하는 경찰과 행정부의 태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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