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늘 곤혹스럽다. 왜 정치얘기만 나오면 결국 멱살을 잡고 싸우고 마는 것일까. 추석 때 마다 벌어지는 노사모인 삼촌과 박정희 찬양자인 할아버지의 다툼 사이에서 나는 늘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아버지는 우리 가족만큼은 절대 정치 얘기를 하지 말자고 합의를 보았다. 명절 날 친척들 사이의 '소통'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무림 고수들 간의 대결

  현재 한국 신문들의 정치 기사는 삼국지 인물들의 세력다툼이나 무협지의 서사와 너무도 유사하다. 특히 정당정치를 다룬 기사들은 제목 뿐 아니라 내용까지도 마치 삼국지의 번외편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제도권 정치에 조직 간의 알력이나 인물들 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러한 이슈들은 정당정치에 있어서 주변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주요 인물들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자극적인 기사들이 올라오는 이유는 제도권 정치 내에 어떠한 이슈, 시의성 있는 사건을 다룬 기사에 비해 훨씬 잘 팔리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를 구성하는 문체는 더욱 무협지와 유사하다. 세련되지 못할 뿐 더러 인물 중심의 갈등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과잉적으로 사용된다. 사건을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으로 풀이해주는 대신 '00파, 종북좌익, 결집, 격돌, 승부처' 등 화려한 수사만 가득한 상황이다. 이는 갈등적 서사와 더불어 기사가 내포하고 있는 상황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준다. 이처럼 인물들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서사와 과잉적 수사가 현재 한국 매체의 정치기사들의 현실이다.

  문제는 대중들이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제도권 정치를 계파간의 투쟁이나 영웅들의 서사시처럼 단순화 시켜버리는 것이다. ‘수사적 단순화'를 통해 복잡한 정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실제는 정반대이다. 수용자들은 구체적인 사실 대신 수사적 문구들만을 기억하게 된다. 24시간 뉴스를 청취하며 생활하는 택시기사들의 정치적 담론이 종종 비난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뉴스와 일간지의 정치기사들을 보며 한국 정치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읽는 것들은 속이 텅 빈 '레토릭' 덩어리에 불과한 셈이다. 결국 이를 수용한 대중들은 정치를 대결식 구도와 과잉적 수사로만 인식하게 된다. 흥미를 자극해 가십을 만드는 이러한 주류언론의 태도는 사회를 천박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진보'과 '보수'를 양 축으로 한 한국인의 이분법적인 정치 프레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적 토론이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데 언론들이 강한 원인 제공을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신문들은 상업주의를 극복하기는커녕 그 구조에 순응하여, 언론을 더 좋은 수익사업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단순히 '언론윤리를 배반한 타락한 언론들!'하고 비난만 한다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해 혹자는 '언론이 각성하면 된다.'는 식의 해답을 내놓지만, 이는 자본이라는 상부구조를 경시한 허무한 외침이다. 정치 기사의 가십화는 언론도 수익을 내야한다는 기업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판매부수는 광고수입과 직결되고, 때문에 구독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내야 한다. 고객의 시선을 끌 수 있도록 정치 뉴스는 과잉적 수사로 포장된다. 최근 포털사이트가 온라인에서 가판대 역할을 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 결과 주류언론의 정치 기사가 스포츠 신문의 연예면과 다를 바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구독률 전쟁 때문에, 연간 구독료보다 많은 상품을 제공하고 고객 모집 전쟁을 펼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런 자극적인 구성이 단기적으로는 수익을 올려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살 행위와 다름 없다. 스스로 경쟁력을 깎아 내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 언론이 무협지를 쓰고 있을 때 위키리크스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매체가 어떤 파급력과 내용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지 지속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해킹이나 불법적 방법이 아닌 내부 고발자들의 자발적인 정보 제공을 통해 새로운 판을 개척한 것이다. 대표적인 SNS인 트위터는 140자라는 제한으로 인해 간단한 형식에 많은 내용을 압축해낸다. 동시에 팔로우(Follow)와 리트윗(Retweet)이라는 기능을 통해 온라인상에서 그 영향력은 더욱 강력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과연 한국의 신문들이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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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이문열이 '소셜네트워크는 종북좌익들의 소통수단'이라고 이야기 한 것을 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옳커니!'라고 무릎을 탁 쳤다. 노무현, 야당 (선) - 이명박, 한나라당 (악)의 아고라식 감성 프레임에 지리멸리함을 느끼던 이들에게는 펀치라인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감동받는 대부분의 레토릭이 그러하듯이, 이것은 속이 텅 빈 멋진 모델하우스와 같다. 이문열의 주장과 달리,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종북좌익(!) 세력들에게 유용한 구조를 지녔거나 일반인들을 세뇌시키는 데 별다른 효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SNS에서 'MB OUT, 4대강 반대'를 리트윗 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것은 그냥 '반정부 정서를 가진 국민들이 늘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본인 셈이다.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 성공과 관계된 논쟁들도 이와 같은 맥락위에 놓여 있다. '그저 이명박 하는 일에 반대만 하면 되는 줄 아느냐!'라고 외치는 이들은 - 과거에는 상상할 수 도 없었던 국위선양의 장에 대한 의심을 목격했다. 아고라식 감성 프레임이 올림픽 유치로 인한 경제 효과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에 일조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세력(!)이 주도했냐, 혹은 감성적인 무조건적 반대냐 와 같은 환원적인 정치공학을 벗어나보면, 이와 같은 논란은 한국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진보(progress)라고 할 수 있다. '나(개인)=국가'라는 생각이 당연한 상식이며 절대적인 명제였던 전근대적인 국가주의 시대를 벗어나고자 하는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 밑의 글은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선대인씨가 쓴 올림픽 유치의 경제 효과와 관련된 글. 좋은 참고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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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간접 경제효과는 그나마 근거라도 있지만, 간접 경제효과로 가면 판타지에 가깝다. 문제의 보고서는 평창이 세계적 겨울 관광지로 부상함에 따라 10년간 32조2000억원의 추가 관광효과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국내 관광수입은 한국 최대 관광 수요국인 일본의 엔화 및 기축통화인 달러 환율에 대부분 연동한다. 예를 들어, 외환위기 이후 환율이 치솟았던 1999년에는 68억달러가량의 관광수입이 발생했으나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와 한·일 월드컵대회가 동시에 치러진 2002년의 관광수입은 59억달러 수준에 그쳤다. 이후 환율이 폭등한 2008년 이전에는 계속 50억~60억달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2002년 두 개의 대규모 국제스포츠행사에 따른 관광수입 증대 효과는 현실에선 사실상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를까. 캐나다 밴쿠버는 로키산맥을 낀 최고의 관광지로 꼽히는데도 2010년 올림픽 개최에 따른 관광수입이 5000억원 정도로 추산됐다. 파급효과까지 따져도 1조원 남짓일 것이다. 그런데 평창 겨울올림픽의 효과가 32조원이나 될 수 있을까. 11조6000억원으로 잡은 국가 브랜드 제고 효과도 구체적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경제효과 과대포장술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경제효과를 최대 24조원으로 추산한 삼성경제연구소도 마찬가지다. 회원국들이 돌아가며 개최하는 국제회의의 경제효과를 운운하는 것부터가 사실 난센스였다. 더구나 해당 보고서는 정상회의 개최로 2002년 월드컵 수준을 상회하는 기업 홍보효과와 수출 증대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게 도대체 납득이 되는 주장인가.

  이미 장밋빛 경제효과를 선전했던 포뮬러원(F1) 그랑프리 대회로 전라남도와 영암군은 빚더미에 앉았고, 13조원의 생산유발 효과가 날 거라고 했던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역시 대회를 치르기도 전에 인천시에 빚폭탄을 안기고 있다.

  기왕 유치한 행사이니 비용 지출을 최소화하면서 내실을 다지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기대 난망이다. 당장 인천공항철도도 적자에 허덕이는 판에 국토해양부는 인구 20만인 춘천까지 9조원을 들여 케이티엑스(KTX)를 깔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여야는 앞다퉈 삽질사업을 밀어줄 기세다. 허황된 경제효과는 이렇게 토건족 정부와 정치인, 건설 대기업, 부동산 투기꾼들을 먹여 살리는 포장술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남는 빚잔치는 누가 치르게 되는가.

- 출처 : 불량사회 ( http://unsoundsociety.tistory.com/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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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리그 승부조작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관여된 선수들이 소환되면서 일단락 된 듯 싶지만, 이것이 겉핥기+겉핡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다. 승부조작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선수 대부분은 생활의 문제 앞에 쉽게 유혹에 흔들릴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다. 국가대표로는 선발되지 못해 국제대회 참시 얻을 수 있는 상금이나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함은 물론, 스타급이 아닌 이른 바 B+급 선수들로서 ‘1등이 되지 못한’ 이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프로축구 선수들이 직접적으로 개입된 승부조작은 최초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 유럽에서는 사설 배팅업체들의 등장 이후 줄곧 논란이 되어왔던 일이었다. 이탈리아 세리에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유럽 프로리그들이 그 논란의 중심지였다. 빅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에 비해 비교적 낮은 연봉을 받는 동유럽 프로 리그의 선수들은 마피아와 도박꾼들의 주 타겟이 되었다. 은퇴를 앞두거나 부양가족이 있는 경우 어두운 판에서 내민 달콤한 요구들을 거절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특히 축구선수의 생명이 30대 중반을 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볼 때, 사회적 안전망이 빈약한 국가의 선수들이 타겟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승부조작에 관여한 선수들의 비도덕만을 비난하지만 시스템 자체가 지닌 결함에는 무관심하다. 우리는 흔히 범죄자들을 원색적인 표현들로 그들의 인성을 비난하지만, 정작 그들이 왜 그런 방향의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흔히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빈민계층이나 차상위계층으로서 이미 사회적 낙오자로 낙인 찍인 상태이다. 즉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미 불행상태에 있는 이들이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여기에서 사회 안전망과 복지, 교육과 같은 테마들이 등장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오히려 ‘개인의 의지’로 얼마든지 일탈행위를 금할 수 있는 것처럼 논의가 진행되고 만다. 따라서 본문과 같은 글은 ‘어떻게 그런 범죄자들을 옹호할 수 있냐!’, ‘그럼 그게 잘했다는 말인가?’와 같은 언어들로 빗겨가 버린다.

  사회학적 성찰이 요구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성범죄가 왜 재개발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발생하는지, 차상위계층의 자녀들이 왜 일탈행위를 하는 횟수가 높은지, 사회적 안전망이 불안정한 국가의 스포츠 선수들이 왜 승부조작에 쉽게 넘어가는가 하는 문제들은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연결고리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가 있느냐!’와 같이 도덕성을 비난하는 표면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왜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해답과 대안을 찾는 쪽으로 담론들이 형성되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사회 속의 인간은 개인의 의지로 모든 것을 해결 가능한 영웅이나 신이 아니다. 오히려 주변 환경에 압도적으로 영향을 받는 객체들이다. 이것이 승부조작논란이 단순히 당사자에 대한 처벌에서 멈추지 말고 ‘사회안전망’에 대한 논의로 발전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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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디들을 정리하다가 주석(JOOSUC)의 4집 앨범을 쭉 듣고있었는데 갑자기 허! 하고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가사가 나와버렸다. 다음 글은 4집 Superior Vol.2 - Seoul City's Finest 에 수록된 '이러쿵 저러쿵'의 가사다.


'자 상상해봐 여긴 청담대로 한복판. 눈 앞을 질주하는 포르쉐 까레라 GT
처음엔 부럽다가 점점 속이 꼬여 일단, 앞뒤 사정도 모른 체 까대다 씹지
재벌집 자식이니 (어쩌구 저쩌구), 돈 많은 저 양아치 (이러쿵 저러쿵)
이봐 헷갈리지마 우리나란 자본주의,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쓰던 본인의 결정
그래 물론 돈 많은 부모한테 기대는 무능한 2세 , 나도 재수없어 그런 뺀질거리는 씹새
하지만 그것또한 인생의 자본금, 그러니 쓸데 없는 관심은 모두 다 민폐
평생토록 그런 열등감 가진채 말만 너무 많아 he say, she say
질투빼면 넌 걸어다니는 시체 불만만 늘어놓는 현실도피 Fuck dat!
...
무서운 병균 시기와 질투, 열등감에 빠져서 약해진 몸에 침투
뒷다마 까는게 병의 징후, 점차 위인이 사라져가는 대한민국
노력과 능력은 좌우지간에, 모두가 자기보다 못나기를 바래
이대로 가다간 미래는 없다네, 모두가 거지인 나라에 살길바래?
U kno? (넌 알어?) 쉬운 게임일수록 보람이 없는 법
어렵다 불평할 시간에 U gotta level up
패배자들의 소지품 그건 바로 변명, 입만 살은 놈들이 망하는 건 천명
인터넷 악플러 대부분 정신병 아니라면 애정결핍된 불쌍한 열등분자
아쉬울 게 없는 사람 Never say it
스스로 올라서서 Make a better day yeah'


가끔은 의외의 텍스트에서 놀라운 통찰(!?)을 발견할 때가 있다. 좀 단정짓자면, 주석의 '이러쿵 저러쿵'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식 자본주의' 혹은 '경쟁' 담론의 종착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단언이 가능한 이유는 , 실제로 주류 미디어나 공석에서 저런 발언을 하는 것이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모두가 거지나라에 살길바래?'라는 구절은 2011년의 모든 의제를 관통하는 punch line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주석은 평소의 스타일대로 특유의 자기과시를 했지만, 이것이 정치성을 획득하려는 순간 - 그의 서사는 한 단계 올라가기는 커녕  퇴보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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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형 미국병

비아냥 2011. 2. 27. 00:00
  멀지 않은 과거, 그러니까 60년대~80년대에 젊은 청춘들이 앓았던 '선진국행'에 대한 열병이 있었다. 미국이기도 했고 구라파이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대한민국이 답답하고 낙후된 제한된 장소였고, 그 제한된 곳에서 접한 파편화된 미국은 너무도 근사하고 놀라운 신세계였다. 하지만 이 로망을 이룬 청춘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 로망을 이룬 청춘들은 무리한 미국행에서 오는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다. 이런 고통들은 이제 미화되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재미교포들'이라는 수사법으로 포장되지만, 사실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사실, 말이 좋아 아메리칸 드림이지 연고지가 아니고 기반도 없는 새로운 지역, 그것도 완전히 문화가 다른 타국에서 완전히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상 이기기 힘든 게임이었다. 가진 자본이 형편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효자동 이발사>에 등장하는 '진기'는 이러한 당시 청춘들의 재현이다. 미국에 대한 판타지로 인해 그는 베트남전쟁에 까지 자원해서 가게 되지만, 결국 손가락들을 잃고 실망감만을 느낀 채 돌아오게 된다. 

  21세기에도 이러한 감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인이 모두 잘 먹고 잘 살고 섹시한 줄 알고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투모로우>를 보며 '아 미국은 정말 멋진 나라구나!'를 연별하게 만드는 기제이다. '미국진출'을 '국위선양'으로 착각하는 음반제작자나, 영화감독들 그리고 그들의 '도전정신'을 칭송하는 보도들은 미국병이라는 전근대성, 그 자체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수십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미국이라는 기표의 폭압성이다. 

  사실,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정치, 행정, 사회, 문화의 롤모델은 '미국' 그 자체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최근에 와서도 '나이든 교수들은 미국이 좋다, 최근 젊은 교수들은 유럽이 좋다 하더군?'라는 식의 레토릭으로 변화되었을 뿐이다. 사실, 미국과 우리나라는 역사와 경제, 사회구조를 통틀어 그 어떠한 유사성도 찾기 힘들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는 구멍을 억지로 넓히며 미국식 모델을 한국 사회에 삽입해왔다. 그 부적절한 국가 운영으로 인한 부작용들은 둘째로 치더라도, 이러한 '미국'이라는 방식은 한국 사회에서 '일방통행'을 강요하는 - 일종의 억압이 되어버렸다.

  가장 일반적인 예로, 한국사회의 양극화와 빈약한 복지에 대해 북유럽이나 프랑스, 독일, 덴마크와 같은 국가들이 대안으로 거론 될 때마다 '에이, 우리나라는 그 나라와는 다르지'라는 식의 냉소가 주를 이룬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들과는 성질이 달라, 그 국가의 정책들을 도입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역사와 경제, 사회구조를 통틀어 그 어떠한 유사성도 찾기 힘든 미국식 모델을 사회 전체에 걸쳐 이식해왔다. 그런 미국 모델이 '현실적'이고, 이와 다른 방향의 대안들은 '비현실적'이라고 단언하는 논법이 모든 의제에 있어서 주를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우습고도 슬픈일이다. 

 이렇듯 미국이라는 기표 아래에서 현실은 비현실이 되고, 비현실은 현실이 된다. 매트릭스를 능가하는 억압이 대한민국의 감성을 지배하는 셈이다. 때문에 이러한 감성의 억압 아래에서는 빨간 약이느냐, 파란 약이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제약회사가 미국 회사냐 제 3세계의 회사냐가 문제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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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에서 실패하고 사라진 <지구를 지켜라>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신기하게도 극장에서 막을 내린 뒤 네티즌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가 극장에 보급될 때는 몰랐는데 다시 다운받아 보니 굉장히 괜찮은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네티즌들은 이 영화 흥행 실패의 이유로 1) 우스꽝스러운 포스터 2) 이해할 수 없는 제목 을 이유로 들었다. 실제로 영화 자체의 세련된 모습이나 깊이에 비해 포스터와 제목은 도저히 '돈 내고 볼 마음'이 들게 하지 않았다. 

한윤형의 <안티조선 운동사>도 이와 마찬가지로, 제목을 안티조선 운동사로 지은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정당정치에 관해서는 '중립'과 '무골호인'이라는 자세가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우리나라에서 '안티조선'이라는 단어를 정면으로 사용한 것은, 대중들의 일반적 프레임으로 인해 '부담스럽고',  '편향된' 첫 인상을 갖게 할 것이 뻔해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결점은 제목이 '안티조선 운동사'라는 데에 있다. 하지만 사실 이 책은 전형적으로 '조선일보 까는 글'이  아니다. 따라서 나중에 이 책은 몇 년 후에야 한두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책이 걍 묻혔지???'와 같은 반응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특정 사회운동을 넘어서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의 사회현상과 이슈들에 대해 정확하고 분석을 하고 판단들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고는 싶은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몰라서 따라잡기가 어렵다', '한나라당이 나쁜 것 같긴 한데 그 이유는 모른다' 혹은 '민주당과 노무현은 정말 천사일까?' 하는 의문, '국회의원들은 똑똑하다는데 왜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욕할까?', '선거 후 공약은 왜 안 지켜질까?', '한나라당이니..한나라당을 밀고 일어설 민주당이니.. 하며 시글벅적한 거리..'에 대한 불편한 의문들과 같이 초보적이면서도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도 애매한 질문들에 대한 명백한 답변이 되어준다.  

이 책은 최근 서점에 쏟아져 나오는 '노무현 찬양 + 이명박 정부 비판' 네러티브의 책들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이유도 없이 그저 이미지에 따라 한나라당을 악마로 보고 이명박을 욕하는 행위들에 대한 훌륭한 답안지가 되어준다. 조선일보의 시기별 변화와, 어떤 면에서 '악랄한 점'들이 존재했는지 분석해내는 것도 물론이고, 조중동의 실제 이해관계는 물론, 주요 선거 때마다의 지면 분석을 통해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를 극렬하게 까는 짓도 서슴지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결코 잘 팔리지 않을 것이다. 조중동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이미지'상으로만 싫어하긴 했지만 객관적인 근거를 내놓으라고 할 때마다 쩔쩔매던 (이른바) 좌빨들이 '훌륭한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해서, 그들과 관계한 유통사와 채널에서 이 책의 흥행을 최대한 막을 것이다.. <한겨레>와 <오마이뉴스>역시 이 책의 발간을 반기기는 할 것이나 동시에 자신들의 죄명(!)들을 명백하게 적어낸 이 책을 '밀어줄'리 만무하다. 

냉소적 회의주의의 입장의 작가가 적어낸 이 책은 누구의 빽도 없으며, 밀어줄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광고나 홍보, 혹은 베스트 셀러란에서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한국 현대 정치사를 객관적이고 명백하게 정리한 <안티조선 운동사>는 그 자체로는 이 씬에서 나올 수 없는 '현대의 classic' 정도의 수준에 다다랐다. 하지만 노무현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지금 중요한 상황을 망치고 있다면서 거부할 것이고,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 두려움을 느끼고 일단 이것이 이슈화되는 것을 차단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늘 요구하는 '공정성' , '객관성'은 하나의 텍스트로 완성되었지만 그것이 널리 이야기되고 즐겁게 보면서 토론할 수 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보인다. 때문에 어떻게라도 찾아서 <안티조선 운동기>를 구하고 이야기거리로서 사랑하는 이들과 이 내용들을 대화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공교육의 결핍을 완벽히 보충해내는 '진짜 공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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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굴개굴 국개론

비아냥 2011. 1. 16. 07:27

  인터넷을 지배하는 반이명박 정서는 '국개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민주항쟁으로 민주적 투표절차를 마련해 놨더니 노태우를 뽑고, 가난한 주제에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하청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주제에 삼성에게 애국심을 느끼는 국민들은 무지몽매한 존재로서 '계몽'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프레임은 아주 매력적이다. 복잡한 현실의 문제들은 쉽고 단정적인 맥락으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개론'의 매력은 정치에 대한 모멸감과 분노를 해소시키는 데 용이하다는 데에서 더욱 강력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개론은 현실에서 그 어떠한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시말해 어떠한 대안이나 지향성을 발견하지 못할 뿐더러, 전혀 한국사회의 핵심을 건드리지도 못하는 것이 바로 '국개론'이다. 언뜻보면 '캬!~'하고 마음 속 응어리를 해소해주기는 하지만 사실 그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ㅇㅇ

   필연적으로 개인은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한국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멍청한 짓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가 무식하고 바퀴벌레만도 못한' 태생적 탓이 아니라, 미디어와 사회제도의 영향으로 인해 그럴 수 밖에 없는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정치권력보다 더 강한 힘을 갖게 된 대형 보수 미디어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기득권들은 지속적으로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제도적인 감성'들을 보급해왔다. 일반 대중들이 접하는 대부분의 채널에서는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내용의 정보들로만 채워져있다. 어려서부터 지속적으로 이러한 담론들에만노출되어왔던 국민들로써는 당연히 정치에 대해 '불합리한 행동'(민주항쟁으로 민주적 투표절차를 마련해 놨더니 노태우를 뽑고, 가난한 주제에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하청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주제에 삼성에게 애국심을 느끼는)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국개론은 이러한 '무지'한 국민들을 욕하는 것을 통해 사회문제의 근원을 찾고자 하지만, 정작 그들이 왜 '무지'하게 됐는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답은 전혀 제공해주지 못한다. 최근 소셜네트워크들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는 '국개론'이 20년전 강준만이 주장한 '언론개혁이 제일 큰 문제'라는 주장보다 더욱 후진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라리 '국민들을 세뇌시킨 조중동이 문제이므로 언론개혁운동을 해야한다!'라는 논법이 훨씬 나아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국개론'이 아고라식 선악구도: '노무현, 야당, MBC, 서민(선) - (악) 이명박, 한나라당, 조중동, 기득권'과 만났을 때 만들어내는 '억압'이다. 최장집은 현대 한국의 정당정치의 문제가 유권자와 대표되지 못한 정치세력의 '균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보수정당내에서만 뺑뺑이를 돌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떠한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반복적으로 실망하게 된 대중들은 정치에 대한 환멸감만 늘게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개론은 '이래서 한국사람은 안되 쯧쯧', '어차피 뭘 해도 안바뀌는데',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식의 정치적 무관심과 환멸과 같은 맥락에 있다.

  실제로 국개론을 내세우는 네티즌 대부분은 아고라식 선악구도에 강하게 동의한다. 하지만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정책적 지향점은 신자유주의라는 같은 토대위에서 마련되었으며, 실제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하청업체들과 서민들의 경제적 파탄이 빈번했다. 국개론과 아고라식 선악구도에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부정되며 '이명박은 나쁜놈'+'그걸 뽑은 국민들은 개새끼'라는 레토릭만 강화된다. 그리고 결국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ㅇㅇ  

  국개론은 그것이 내포한 기본적인 문제제기 : 어째서 국민들이 개같은 짓을 반복하는가?에 대해 어떠한 답도 말해주지 못한다. 이 무식하고 멍청한 국민들을 '계몽'해야하는데 그 계몽의 수단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걸 담'론'으로 봐야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저 '대한민국 국민들은 멍청하다. 암울하다. 병신들'이라는 자괴감만 반복될 뿐이다. 때문에 국개론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 2008년 6월 이후 '다음 아고라'의 종말의 재목격인 셈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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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진요 사건을 계기로 네티즌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 타진요가 잘못한 것이 명백한 상황인데 어떻게 네티즌 편을 들 수 있나?

 타진요는 잘못했다. 분명한 사실이다. 잘못된 믿음이 유통되었으며 타블로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타진요 사건에 근거해 ‘인터넷은 무법천지의 장이며, 네티즌들을 강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담론은 상당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 잘못을 저지른 그들을 통제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경찰은 이미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타진요의 주요 멤버 18명에게 불구속 입건과 수배령을 내렸다. 문제는 ‘인터넷’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한 일부 ‘한국 사회’의 주체들이다.

○ 심각한 상황으로 보이는데 네티즌들을 그대로 놔두면 어떡하란 말인가?

 인터넷은 사건이 발생한 ‘장소’일 뿐이고, 단지 이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스크린일 뿐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폭발적으로 문제시 된 것은 언론의 탓이 크다.

○ 타진요 탓이 아니라 언론의 탓이란 말인가?

 한국 언론 환경에서 한 가지 주제가 생산되는 비정상적인 과정 중 하나가, 네티즌이 쓴 글을 언론에서 받아적고(공증, 정확히 말하자면 온라인의 논란거리가 진짜 사람들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라는 걸 공증해준다.) 그것에 대중들이 반응할 때만 비로소 ‘현실적으로 문제’가 된다.

실제로 온라인에서는 수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닌다. 예컨대, A군이 악질 뺑소니범임에도 처벌을 받지 않고 버젓이 방송활동을 하고 있다든가, B양이 스폰서를 통해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를 했다던가. 하지만 포털사이트에 배급되는 메이저 신문사와 오프라인 언론에서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공증)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에 타블로 사건이 문제가 된 건 오프라인 언론과 TV, 온라인 신문매체가 강하게 주목을 했기 때문이다. 언론이 다루지 않고, 포털사이트 메인에 지속적으로 타블로 의혹 기사가 계속 보급되지 않았다면 이 일은 앞서 제시한 예시들과 그냥 묻혔을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루머들은 인터넷 공간 외에서는 그다지 파급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터넷의 영향력은 오프라인 매체와 연동되어 있다. 오프라인 매체에서 침묵하는 한, 인터넷 속의 일은 찻잔 속의 태풍이다. 오프라인 매체에서 그걸 의혹이라고 중요하게 다뤄주니까 그게 ‘문제’가 된 것이다.

 언론은 ‘타진요’가 주장하는 의혹의 실체에 접근하려하기보다는 그대로 받아써 논란을 키우고 한편으론 타블로가 일부러 해명을 안 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기사의 제목은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면서 비리 정치인의 스캔들을 다루는 기사와 같은 구조로 기사를 구성했다. 언론들이 처음부터 MBC 스페셜이 했던 것처럼 타진요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 그것이 왜 성립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사태가 커지지 않았을 것이 자명해 보인다. 사실, 그 진위를 가리는 것은 언론사의 입장에서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좀 더 자극적인 컨텐츠로 판매부수와 조회수를 늘리기 위해, 스탠포드에 전화를 하거나 취재진을 보내는 대신, ‘의혹’ 혹은 ‘가능성 제기’ 수준에 수렴하는 기사들만 생산해냈다. 결국 이번 타진요 사건의 승리자는 타진요와 타블로 그 누구도 아닌, 조회수를 올려 상당한 광고수익을 얻어낸 언론들이다.

○ 그럼 타진요가 잘못이 없단 말인가?

타진요는 잘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처벌을 받았다. 인터넷 상의 범죄를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는 이미 충분히 잘 마련되어 있는 편이다. 하지만 현재 나오고 있는 주요 담론들은 언론들의 ‘얠로우 저널리즘’에 대한 언급 없이 바로 인터넷만 공격하고 있다. 이는 온라인 네티즌에 대한 과한 비판이기에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정치적 의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확대 해석 아닌가?

 사실 불구속 입건 통보를 받은 ‘왓비컴즈’를 비롯한 타진요의 수뇌부 상당수가 외국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거나,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은 경험자,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이들이었다. 타진요 사건을 ‘법적 기본 개념과 매너도 없는 무식한 유저들의 폭력’이라고 보기에는 난감하다. 즉, 타진요 사건에 루머 생산에 가장 ‘악질적인’ 행위를 한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부르주아지들인데, 이번 사건으로 만약 ‘인터넷 규제 강화’가 된다면 가장 타겟이 될 사람은 정치나 주류사회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하게 되는 ‘사회적 비주류’나 ‘중간계급 이하의 약자’들이다.

 인터넷의 악성 루머나 댓글의 폭력성에 대한 제도적 장치, 법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거나 결함이 심하다면 제도를 강화하여 통제의 수위를 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한 두 개의 사례로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각 주체들 사이에 발생하는 온라인 상의 명예훼손이나 언어폭력에 대한 처벌은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편이다.(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 때문에 타진요는 결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거나 ‘네티즌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표본이 될 수 없으며, 그 반대급부(정당정치 내에서 부적절하게 이용될 가능성)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이 주장이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보여진다.

○ 아직 동감하지 못하겠다. 잘못을 저지른 이를 통제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다른 사례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인 비교를 하자면, 수백, 수천명의 유저들이 몇 년 전부터 지속으로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란이나 그들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이명박 대통령이나 측근 정치인들을 비방하는 글들을 지속적으로 남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상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타진요가 사용했던 언어보다 더 폭력적이고 노골적이지만 누구도 그런 소통의 방식을 마련해주는 인터넷이라는 포맷 자체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서 살펴보면 ‘타진요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인터넷에 강한 철퇴가 필요하다’는 식의 논법은  부적절해 보인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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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방선거 이후 싫어진 프레시안에 간만에, 정말 간만에 들어가봤는데 기사가 하나 떴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01101095011&section=02
기륭 싸움 1895일…오늘 오후 종지부

"이렇게 쉽게 될 일, 왜 6년을 끌었나"…기륭 노동자들의 허탈한 눈물

2. 그리고 동시에 떠오른 것 - 세 달 전일
- [종합]법원 "KTX 여승무원 해고 부당"
--KTX 여승무원들 1500여일만에 웃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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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는 꽤 똑똑하다. 한국 사람들 대다수가 아직도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것을 깨닫고는 오래전 부터 지속적인 이미지 전략을 실행중이다. 중장년층에게 이 전략은 200% 효과적이며, 매번 선거 때 마다 같은 방식으로 훌륭한 성공률(!)을 기록한 결과 한나라당의 입지는 변함이 없다. 지방선거를 앞둔 2010년 5월에도 이 패턴은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어느 정도는 그들의 전략이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젊은 세대들로 갈수록 그들의 이미지 전략에 넘어가지 않는 비율이 점차 많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한국의 보수미디어는 과연 그들의 체제를 재생산해낼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쉽게 말해서, 그들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미지 전략’으로 성공적인 미디어 단층을 마련한 것이 과연 미래에도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안한 미래’에 대한 방어책으로 대형언론사들이 선택한 방패가 ‘미디어 법’이다. 한나라당이 이러한 대형언론사들에 등에 밀려(혹은 손을 잡고) 강력한 입법을 추진한 것은 자명해 보인다.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조선일보는 좌파를 죽이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좌파를 만들어 내는 일에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선일보=한나라당 기관지’라는 공식은 사실 유효하지 않다. 그들은 그저 돈과 권력을 많이 가진 대한민국의 강력한 기관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모든 불순세력(!)들이 죽어버리면 그들은 존재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오늘도 한 승려를 좌파로 만들고, 전교조를 김일성 찬양 빨갱이로, 야당을 친북정당으로 만드는 시도를 계속한다. 이렇듯 그들의 존재는 어떤 고유한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좌파에 대한 반대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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