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열이 '소셜네트워크는 종북좌익들의 소통수단'이라고 이야기 한 것을 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옳커니!'라고 무릎을 탁 쳤다. 노무현, 야당 (선) - 이명박, 한나라당 (악)의 아고라식 감성 프레임에 지리멸리함을 느끼던 이들에게는 펀치라인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감동받는 대부분의 레토릭이 그러하듯이, 이것은 속이 텅 빈 멋진 모델하우스와 같다. 이문열의 주장과 달리,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종북좌익(!) 세력들에게 유용한 구조를 지녔거나 일반인들을 세뇌시키는 데 별다른 효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SNS에서 'MB OUT, 4대강 반대'를 리트윗 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것은 그냥 '반정부 정서를 가진 국민들이 늘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본인 셈이다.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 성공과 관계된 논쟁들도 이와 같은 맥락위에 놓여 있다. '그저 이명박 하는 일에 반대만 하면 되는 줄 아느냐!'라고 외치는 이들은 - 과거에는 상상할 수 도 없었던 국위선양의 장에 대한 의심을 목격했다. 아고라식 감성 프레임이 올림픽 유치로 인한 경제 효과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에 일조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세력(!)이 주도했냐, 혹은 감성적인 무조건적 반대냐 와 같은 환원적인 정치공학을 벗어나보면, 이와 같은 논란은 한국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진보(progress)라고 할 수 있다. '나(개인)=국가'라는 생각이 당연한 상식이며 절대적인 명제였던 전근대적인 국가주의 시대를 벗어나고자 하는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 밑의 글은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선대인씨가 쓴 올림픽 유치의 경제 효과와 관련된 글. 좋은 참고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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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간접 경제효과는 그나마 근거라도 있지만, 간접 경제효과로 가면 판타지에 가깝다. 문제의 보고서는 평창이 세계적 겨울 관광지로 부상함에 따라 10년간 32조2000억원의 추가 관광효과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국내 관광수입은 한국 최대 관광 수요국인 일본의 엔화 및 기축통화인 달러 환율에 대부분 연동한다. 예를 들어, 외환위기 이후 환율이 치솟았던 1999년에는 68억달러가량의 관광수입이 발생했으나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와 한·일 월드컵대회가 동시에 치러진 2002년의 관광수입은 59억달러 수준에 그쳤다. 이후 환율이 폭등한 2008년 이전에는 계속 50억~60억달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2002년 두 개의 대규모 국제스포츠행사에 따른 관광수입 증대 효과는 현실에선 사실상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를까. 캐나다 밴쿠버는 로키산맥을 낀 최고의 관광지로 꼽히는데도 2010년 올림픽 개최에 따른 관광수입이 5000억원 정도로 추산됐다. 파급효과까지 따져도 1조원 남짓일 것이다. 그런데 평창 겨울올림픽의 효과가 32조원이나 될 수 있을까. 11조6000억원으로 잡은 국가 브랜드 제고 효과도 구체적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경제효과 과대포장술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경제효과를 최대 24조원으로 추산한 삼성경제연구소도 마찬가지다. 회원국들이 돌아가며 개최하는 국제회의의 경제효과를 운운하는 것부터가 사실 난센스였다. 더구나 해당 보고서는 정상회의 개최로 2002년 월드컵 수준을 상회하는 기업 홍보효과와 수출 증대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게 도대체 납득이 되는 주장인가.

  이미 장밋빛 경제효과를 선전했던 포뮬러원(F1) 그랑프리 대회로 전라남도와 영암군은 빚더미에 앉았고, 13조원의 생산유발 효과가 날 거라고 했던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역시 대회를 치르기도 전에 인천시에 빚폭탄을 안기고 있다.

  기왕 유치한 행사이니 비용 지출을 최소화하면서 내실을 다지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기대 난망이다. 당장 인천공항철도도 적자에 허덕이는 판에 국토해양부는 인구 20만인 춘천까지 9조원을 들여 케이티엑스(KTX)를 깔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여야는 앞다퉈 삽질사업을 밀어줄 기세다. 허황된 경제효과는 이렇게 토건족 정부와 정치인, 건설 대기업, 부동산 투기꾼들을 먹여 살리는 포장술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남는 빚잔치는 누가 치르게 되는가.

- 출처 : 불량사회 ( http://unsoundsociety.tistory.com/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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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가 '반값 등록금'을 야심차게 내놓았을 때 솔직히 궁금했다.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어떤 신묘한 방법을 통해 등록금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것인가? 그러던 중에 5월 30일 김성식 한나라당 정책위 부의장이  대책을 내놓았다. '소득 하위 50%와 학점평점 B이상' 이라는 기준에 맞춰 장학금을 지원하며 그마저도 부실대학에는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2조원 가량의 예산을 만들 수 있다는 대책이다.

 

 

이걸 진지한 자세로 논평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왜 등록금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지부터 짚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등록금 인상의 주요한 원인을 찾아본다면 등록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대학 적립금 문제를 그 첫 번째로 꼽을 것이다. 대학이 과도하게 이월금을 적립하고 있으며 이를 투명하게 사용하지 않고, 그러고도 예산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등록금을 인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대학은 왜 쓰지도 않을 적립금을 쌓아두고 있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대학교육의 시장화에서 찾아야 한다.

 

 

군부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국가가 부당한 방법을 사용하여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살고 있었으므로 민주화가 시작된 이제부터는 사회의 각 부분을 국가로부터 빼앗아 와서 시장이 공정함을 보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신앙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학 등록금 문제에 있어서 '자율화'라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1989년 사립대학의 등록금 자율화가 시작된 것으로부터 2002년 국공립대의 등록금 전면 자율화에 이르면서 대학 등록금과 관련한 교육의 시장화라는 1단계가 사실상 마무리 됐다. 이로써 시장원리에 의한 대학 간의 공정한 경쟁이 시작될 것 같았지만 결과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듯이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시장주의자들의 정부는 등록금 책정 문제와 더불어 대학 재정의 운용과 관련해서 대학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규제를 줄이고 대학의 자율성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하면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 역시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지옥의 문을 여는 데에 일조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이 다음으로 획책하고 있는 것은 공정한 시장 경쟁이 무한대로 가능할 수 있도록 대학교육의 시장을 엄청난 크기로 늘리는 것, 즉, '교육개방'이다. 영어와 실용학문을 수출하는 외국의 명문대를 국내에 유치해서 기러기 아빠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내용이 이명박 정부의 '서비스 산업 선진화 방안'에 들어있다. '기러기 아빠'는 지금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2009년 5월 8일에 '서비스산업 선진화를 위한 민관합동회의'가 발표한 '경제난국 극복 및 성장기반 확충을 위한 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 (요약)' 이라는 문건에 나오는 말이다.

 

 

이런 엄청난 스케일의 세계적인 경쟁을 하면 더 이상 매일같이 '서울대가 세계 대학 순위 50위권 안에 들 수 있는가?'를 가지고 싸울 일도 없고 우리 대학의 경쟁력이 막 강화되며 이는 국가 인적 자원의 수준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지금까지 한국을 좌지우지해온 시장주의자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잠시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보자. 대학과 관련된 것은 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유행에 발맞추어 김영삼 정부 때 대학 설립도 마음대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이미 대학은 공급 과잉이다. 그럼 교육개방이 시작되고 대학교육의 시장화가 완성되면 이들 중 없어져야 할 대학이 몇 개인가? 시장주의자들은 이걸 '구조조정'이라고 부르지만 대학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이유가 된다. 진실한 경쟁의 원리는 이렇게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재정을 확보하고 이것을 효율적으로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 효율적인 투자란 무엇인가? 이것 역시 평가를 받는 대학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첫째, 어쨌든 무조건적인 재정건전성을 도모해야 하고, 둘째, 대학평가에서 보다 높은 순위를 얻기 위해 시설에 투자해야 하며, 셋째, 이를 통해 연구 성과를 내야하고, 넷째, 보다 많은 외국인을 유치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학은 이렇게 저렇게 부동산 투자도 하고 주식, 펀드 투자도 하면서 공격적으로 재정을 운용해 왔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손실을 보면 등록금을 인상하면 되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최근 국립대 법인화와 대학의 재정회계법 개정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이 역시 국립대를 좀 더

자율화해서 시장원리에 충실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돈을 마음대로 꾸고 마음대로 쓰도록 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위에 언급한 대학교육의 시장화 문제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데, 덕분에 우리 신세만 이 모양 이 꼴이 됐다.

 

 

이런 상황에 보수주의자들이 등록금을 반값으로 만들고자 할 때 취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이 있겠는가? 첫째로 학자금 대출에 대한 정책을 세우는 방법이 있는데 이건 ‘취업조건부 학자금 대출제도’니 ‘든든학자금’이니 뭐니 해서 이미 실행하다가 욕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둘째는 대학에 직접적으로 지원금을 막 집어넣는 방법이 있는데, 이건 시장 원리에 걸맞지도 않을뿐더러 이미 대학 자율화를 끝까지 밀어 붙이는 마당에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었다. 모든 대학에 다 지원금을 넣으면 시장주의자들이 늘 꿈꾸는 대학 구조조정도 불가능해진다. 그러자면 어느 대학에 지원금을 줄지 기준을 정해야 하는데 그 기준을 정하는 게 쉽지 않고 가뜩이나 어지러운 정국에 사학자본까지 나서서 난리를 치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다. 그렇다고 국공립대에만 지원을 하자니 국공립대의 등록금 수준을 높여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게 하자는 그간의 정책 방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수단이 장학금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었고 이것마저도 늘 ‘모럴해저드’를 경계해야 하는 시장원리에 걸맞는 방식으로 하려다 보니 ‘B학점 이상’이라는 누가 봐도 이상한 기준이 나와 버린 것이었다. 일단 ‘반값등록금’이라고 질러놓고 자기들 상식에 맞는 얘길 하려니 죽도 밥도 안 되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국 이 거대한 ‘해프닝’은 당내 정치를 겨냥한 황우여 원내대표의 초라한 개인기와 ‘대학교육의 시장화’라는 문제를 죽었다 깨어나도 건드릴 수 없는 한나라당 소장파들의 코미디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의 등록금 문제에 관한한 이들은 영원히 시기상조라는 태도를 견지해야 맞는데, 이번에 워낙 급하게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어 모두를 민망하게 했다.

- 이상한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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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리그 승부조작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관여된 선수들이 소환되면서 일단락 된 듯 싶지만, 이것이 겉핥기+겉핡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다. 승부조작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선수 대부분은 생활의 문제 앞에 쉽게 유혹에 흔들릴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다. 국가대표로는 선발되지 못해 국제대회 참시 얻을 수 있는 상금이나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함은 물론, 스타급이 아닌 이른 바 B+급 선수들로서 ‘1등이 되지 못한’ 이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프로축구 선수들이 직접적으로 개입된 승부조작은 최초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 유럽에서는 사설 배팅업체들의 등장 이후 줄곧 논란이 되어왔던 일이었다. 이탈리아 세리에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유럽 프로리그들이 그 논란의 중심지였다. 빅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에 비해 비교적 낮은 연봉을 받는 동유럽 프로 리그의 선수들은 마피아와 도박꾼들의 주 타겟이 되었다. 은퇴를 앞두거나 부양가족이 있는 경우 어두운 판에서 내민 달콤한 요구들을 거절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특히 축구선수의 생명이 30대 중반을 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볼 때, 사회적 안전망이 빈약한 국가의 선수들이 타겟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승부조작에 관여한 선수들의 비도덕만을 비난하지만 시스템 자체가 지닌 결함에는 무관심하다. 우리는 흔히 범죄자들을 원색적인 표현들로 그들의 인성을 비난하지만, 정작 그들이 왜 그런 방향의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흔히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빈민계층이나 차상위계층으로서 이미 사회적 낙오자로 낙인 찍인 상태이다. 즉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미 불행상태에 있는 이들이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여기에서 사회 안전망과 복지, 교육과 같은 테마들이 등장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오히려 ‘개인의 의지’로 얼마든지 일탈행위를 금할 수 있는 것처럼 논의가 진행되고 만다. 따라서 본문과 같은 글은 ‘어떻게 그런 범죄자들을 옹호할 수 있냐!’, ‘그럼 그게 잘했다는 말인가?’와 같은 언어들로 빗겨가 버린다.

  사회학적 성찰이 요구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성범죄가 왜 재개발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발생하는지, 차상위계층의 자녀들이 왜 일탈행위를 하는 횟수가 높은지, 사회적 안전망이 불안정한 국가의 스포츠 선수들이 왜 승부조작에 쉽게 넘어가는가 하는 문제들은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연결고리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가 있느냐!’와 같이 도덕성을 비난하는 표면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왜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해답과 대안을 찾는 쪽으로 담론들이 형성되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사회 속의 인간은 개인의 의지로 모든 것을 해결 가능한 영웅이나 신이 아니다. 오히려 주변 환경에 압도적으로 영향을 받는 객체들이다. 이것이 승부조작논란이 단순히 당사자에 대한 처벌에서 멈추지 말고 ‘사회안전망’에 대한 논의로 발전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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