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꼼수다>가 지닌 영향력은 점점 강력해지고 있다. 대놓고 '반 MB'를 내세운 이 인터넷방송이 히트를 치자 이명박 지지자들은 난리가 났다. 하지만 정제원의 발언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 나꼼수에 대한 기성정당의 비판은 철저히 정치공학적이며 영양가 없는 비난에 불과했다. 누구도 공감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잠수함 속의 토끼' 진중권이 입을 열었다.

  진중권은 이미 나꼼수 17화에서 곽노현 교육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바 있었다. 실제로, 17회에서 19회에 이르기까지 김어준은 이전 편의 '구체적인 팩트에 의한 이해관계의 폭로'와는 다르게 다소 온정주의적으로 접근했다. 노무현이나 한명숙이 당했던 표적 수사와는 명백한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곽노현 사건을 이와 엮어서 그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진중권이 오마이뉴스에 기재한 '곽노현 거울에 비친 진보의 일그러진 초상'은 이 상황을 가장 완벽하게 정리한 텍스트이며, 나꼼수가 사용한 온정주의적 프레임의 오류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하다.) 덧붙여 <나꼼수>를 '닭장속에 닭'에 비유하며 대중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문제의 시작

  본격적인 문제는 10월 29일 나꼼수 콘서트를 관람하고 온 관객들이 '에리카 김과 이명박 대통령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글을 올린 직후에 시작되었다. 실제로 콘서트에서 주진우 기자는 '(그분과 나는) 부적절한 관계였다'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는 에리카 김의 녹취 내용을 공개했다. 또한 김용민이 이명박 대통령의 친자확인과 관련해 '눈 찢어진 아이를 데려오겠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 날 밤부터 모든 포털사이트에는 인기 검색어에는 '눈 찢어진 아이'와 '에리카 김'이 랭크되었다. 진중권은 이를 '외설적이며 폭력적이다'라고 판단하면서 트위터에 글을 올렸고, 많은 팔로워들이 이에 반박하고, 관련 기사가 나오면서 파장은 커졌다.


진중권의 주장 - 폭력적이며 외설적이다

  진 씨는 30일 한 트위터리안이 “(나는 꼼수다의) ‘눈 찢어진 아이’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너저분한 얘기라고 생각한다“며 ”야담과 실화. 저열하고 비열한 공격. 언젠가 똑같이 당할 것. 무엇보다도 불필요한 공격, 도대체 뭘 위한건지"라고 비판한 것이다.  진씨는 또 "주진우의 저질 폭로가 '팩트'라면 아무 문제 없다고 버젓이 말하는 저 정신상태가 황당하다"고 비판하고 "한껏 들떠서 정신줄 놓고 막장까지 간거다. 저럴 것 같아서 내가 미리 경고했거늘... 포르노라는게 원래 노출 수위를 계속 높여야 한다"며 "주진우, 정봉주는 사실을 만진다. 그건 개그가 더 이상 개그가 아닌 순간이 존재한다는 얘기"라고 비판적 견해를 밝혔다.  

  (미디어 오늘, 2011.10.31)

  진중권의 의견을 가장 잘 정리한 텍스트이다. 이와 더불어 진중권은 “눈찢어진 아이는 BBK와 전혀 관련이 없죠. 에리카킴과의 관계 역시 본질과 아무 관계 없어요. 핵심은 (1) 실소유주가 누구냐, (2) 주가조작에 관여했느냐인데, 그건 에리카킴과 염문을 갖느냐 마느냐와는 논리적으로 독립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대중들의 분노 - 순기능을 모조리 무시했다

  폭압적인 언론 장악 행태(정권이 임명 방송사 사정들의 비판 차단, 진보 인사들 공중파 하차 강압 의혹, 방통위의 검열기관화)에 지리멸리함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던 대중들에게 <나꼼수>는 정말 속시원하고 신선한 포멧이었다. 특히 사실성에 기반한 주진우의 취재 일기는 프로그램의 질을 상승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진중권은 특유의 냉소적 논법으로 모든 패널들을 비판했다. '너절리즘'이라고 주진우를 비꼬고, '정봉주 의원은 결정적 한방이 없으니 사생활 잡기로 들어간다'라고 글을 올렸다.

  나꼼수의 지지자들은 분노했다. 정권의 폭압적 언론 행정 밑에서, 단비와 같았던 <나꼼수>에게 어떻게 이렇게 강력하고 노골적인 언어로 비난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 동안 극우언론들에게 어떻게 당하고 살았는데, 이에 반대에서 노력한 나꼼수에게 어떻게 이럴수 있냐', '조중동이 더 심하게 할 때는 가만히 있고 왜 이럴 때 나서서 논란 만드냐'가 공통적인 심리이다. 나꼼수의 순기능을 외면한 채 역기능에만 깔대기를 대고 있다는 것이다.  


<나꼼수>가 제2의 아고라가 되지 않기 위해서

  다음 아고라는 한 때 공론장에 가장 근접했던 커뮤니티 중 하나였다.(적어도 내 기억에는) 하지만 2008년 6월 이후 급격히 늘어난 유저들 대부분이 '반MB 정서'를 기반으로 모든 상황을 해석해 버리는 데에서 이 커뮤니티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노무현, 야당, MBC, 서민(선) - (악) 이명박, 한나라당, 조중동, 기득권 이라는 아고라식 프레임은 그들의 지배적 담론이 되었다. 노무현의 신자유주의 행위를 외면하고 그를 천사화 했으며, 야당과 유시민, 김대중은 무조건적으로 옹호되었다. 이러한 아고라식 선악구도는 현실 정치를 설명하는 데 별로 유용하지도 못했으며, 사실관계마저 흐트려 버렸다. 영향력은 한정적이었고, 새로운 논의 없이 과거의 것이 반복되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한 때 다중지성과 촛불의 1등 공신으로 여겨졌던 아고라를 네이버 댓글이나 정사갤과 다름없이 여기게 되었다.

  <나꼼수>가 배워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다음아고라의 단정적인 면은 나꼼수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동안의 맥락을 고려할 때 콘서트 발언은 선정적이었고, 대중들은 이를 외설적으로 소비했으며, 그것이 '반MB 정서'를 통해 정당화 되었다. 이것이 아고라식 프레임이 나꼼수와 지닌 치명적인 유사점이다. '이것이 애초의 프로그램 포멧이다!'라고 이야기 하기에는 이미 나꼼수는 쇼가 아닌 막강한 정치평론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특히, 그것을 쇼가 아닌 진리로서 소비하는 대중들이 이것을 '원래 그런 프로 아니냐'고 대답을 해버린다면 스스로 자멸하는 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혹은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아래의 텍스트가 훌륭한 참고가 되어준다. 문화 평론가 이택광이 나꼼수 논란에 대해 남긴 트윗이다.
 


진중권의 몇 가지 자승자박

  하지만 진중권의 주장 역시 몇 가지 극복해야 할 문제는 남아있다. 진중권은 <나꼼수>가 '팩트와 픽션을 넘나들어 위험하다'라고 판단했지만, 사실 나꼼수 진행의 바탕이 되는 정보들은 정확한 편이다. 특히 주진우가 제공하는 취재 일기의 순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진중권이 17회 말고는 나꼼수를 들어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단정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중들의 수용방식에만 집중을 하고 그 원본 텍스트에 대해서는 정보가 전무한 상태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윤형이나 허지웅의 나꼼수에 대한 비판이 '과연 그 방송을 제대로 들어보고 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거시적인 기존 담론의 틀을 맞추기 위해서 하나의 상황을 전체화했다는 비판이 가능한 부분이다.  

  덧붙여 진중권은 주진우에 대해 "저질 폭로가 팩트라면 아무 문제 없다고 버젓이 말하는 저 정신상태가 황당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바로 당장 진중권이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Posted by 양피지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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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론과 쌍용차 너머에 있는 것들

한윤형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90년대의 문화적 조류에서 사춘기를 보낸 사람이다. 자유주의적 주체, 냉소주의적 주체에, 세상을 ‘노동자’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경영의 논리로 생각하는게 더 익숙한 사람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같은 놈이 ‘좌파’라고 불리게 된 이놈의 세상과 시대가 진짜로 웃기고 자빠졌다고 내내 생각해 왔다. 지금까지 그런 말을 굳이 안 한 것은, 호칭이야 부르는 놈들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나는 좌파가 아니야!!!”라고 외치는 게 ‘진짜 좌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런 말을 서두에 꺼낸 건 세대론과 쌍용자동차 투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고지하기 위함이다.


‘88만원 세대론’이란 게 한국 사회에 폭풍의 떡밥처럼 투척된 지도 어언 3년이 흘렀다. 젊은이들의 대다수가 88만원을 받고 살게 될 거라는 묵시론의 예언에 맞서 조선일보는 우리의 젊은 글로벌 세대들이 세계를 제패할 것이라는 ‘G세대론’을 내세웠다. 그러는 사이 3-40대들은 20대가 투표를 안 해서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개탄했고 20대들은 사회를 이렇게 만든 게 모두 당신들인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버럭 성질을 냈다. 세대론이 계급문제를 은폐하고 우익들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담론이라는 좌파들의 개탄이 있었고, 세대불평등이 통계자료에 유의미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어느 사회학자의 타당한 지적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취업 컨설턴트들은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환기시키기 위해 ‘88만원 세대론’을 써먹었고 당사자 운동이란 걸 만들어보려는 극소수의 20대들은 암중모색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다.  


‘88만원 세대론’의 본질을 무어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담론이 애초부터 중간계급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 담론의 시선은 ‘원래부터 88만원 정도를 벌었던 젊은이들’에게 가 있지 않다. 그 시선은 저 묵시론적 예언을 듣고 ‘혹시 나도 88만원 정도를 벌게 될지도 모른다고 불안감을 느끼게 된 젊은이들’을 향한다. 그런 젊은이들의 불안감이 <88만원 세대>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그 불안감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온전히 대변하지 않으며, 더구나 ‘미래’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러므로 ‘세대불평등’이란 것이 통계자료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이들의 불안감이 폭로하는 사회문제는 어떤 진보적인 가치지향에서 잡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면서, 그렇게 해서 훼손된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그들 중산층의 자녀조차 자신의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신나게 날다가 되돌아와 던진 사람의 뒷통수를 치는 부메랑이다.


어찌 이 문제만이겠는가.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을 때 경악스러운 이유는 삼성의 부도덕성이나 뻔뻔스러움 때문만은 아니다. 냉소주의와 경영논리에 찌든 눈은 다른 지점을 바라본다. 삼성이란 조직이 운용되는 방식이 이 기업의 지속적인 생존가능성에 대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가 걸리는 것이다. 이건희는 이미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아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복귀했다. 삼성이 위기라는 이건희의 주장은 경제신문들의 ‘건비어천가’가 아니더라도 옳다. 하지만 이건희라고 해서 영원히 살 수 있단 말인가. 핸드폰을 애플보다 열 배는 더 많이 팔면서도 수익은 그만큼 올리지 못하는 삼성, 비자금 관리자를 기술개발자보다 우대하는 삼성의 경영방식은 가격경쟁력을 위한 노동자의 희생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저임금 노동자에 길들여진 이 ‘초일류기업’이 노동자를 백혈병으로 죽이면서 세계를 호령하는 일은 얼마나 더 가능할까. 한국의 지배계급이 정말로 ‘삼성의 몰락=대한민국의 멸망’이란 등식을 믿는다면 지금은 ‘지속가능한 삼성’을 위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저 재벌총수를 설득할 때다. 하지만 소위 ‘보수진영’에선 이건희를 비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국 자본주의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대문제의 핵심이다. 한국경제를 주도하는 장년세대는 자신들이 이룩한 산업화의 성과에 뿌듯함을 느끼며, 자식세대가 그것을 무한히 존경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현실은 그네들의 자녀들이 자식가지는 것을 꿈꾸지 못하는 ‘출산파업’의 현실이다. 이 현실에 맞닥트린 지배계급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연하기 위해 ‘낙태 반대’ 캠페인을 벌인다. 부모세대가 만들어온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이런 추세대로라면 몇 십 년 안에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대한민국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선 누군가 문제를 직시해야 하지만 뱀은 우물 바깥을 보지 않고 빙그르르 돌아서 자기 꼬리를 문다. 탐욕스러운 뱀은 날카로운 이빨로 자신의 꼬리를 잘라내어 집어삼킨다.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란 뱀의 꼬리였다. 정규직 노동자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외면하고 사회문제를 외면하면 자신들만은 살 줄 알았던 그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해고됐다. 이들의 투쟁을 외면하면 우리는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노동자들을 잘라내고 기업의 안녕을 도모하는 기업들은 그렇게 ‘제 살 깎아먹기’에 몰두하다가 나중에 물건은 누구에게 팔아먹을 생각일까?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오로지 수출만으로 먹고 살면서, 제 나라 노동자들을 끝없이 착취할 자신이 있는 걸까? 박리다매로 글로벌 기업이 된 위대한 삼성조차 100% 내수인 금융으로 수조원의 이익을 내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말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미래를 모르는 탐욕스러운 뱀의 꼬리에 위치했다면, 88만원 세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서 대한민국의 현실이 드러날 게다. 88만원 세대가 쌍용자동차 투쟁과 만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쌍용의 노동자들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애저녁에 포기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용안정을 보장받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은 젊은이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에 다니는 젊은이들 중 대다수가 돈이 조금 모이면 그 기업에서 나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을 꿈꾼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정년까지 일하리란 꿈을 꾸지 못한다. 안 그래도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한국 사회에 이 친구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좌파만의 의무’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좌파’라는 힐난을 듣게 된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소리를 듣는다. “좌파는 성선설(性善說)을 믿으니 문제”라던 사람들이 한편으로 말하는 것이 저 ‘따뜻한 마음’이다. 사실 내 안에서 그런 반응에 조소하는 큰 부분은 좌파적 감수성이기는커녕 냉소주의와 경영의 논리다. 국방력 강화에 큰 관심이 있었던 전직 대통령은 북한 땅을 중국에 갖다 바치려는 수준의 철딱서니없는 ‘보수’들에게 ‘좌파’로 매도당했는데, 사실 그는 ‘노동자’의 시선을 보여주기는커녕 쌍용차에 투자하겠다는 상하이차 자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자본가의 ‘선량한 마음’을 신뢰했다. 쌍용차의 현재 상황에 치를 떠는 감수성 역시 생활터전을 뺏긴 노동자를 챙긴다는 진보의 논리 이전에 ‘매각’을 잘못한 경영진의 ‘착한 마음’에 대한 냉소에서 나온다. 그 선량한 사람들의 순진한 행동 속에서, 일자리를 뺏긴 사람들은 ‘악’이 받칠 수밖에 없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뺏긴 것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이 처음부터 가지고자 욕망하지도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 것을 욕망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배운 젊은이들은 월급이 적어도 안정성을 찾기 위해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맨다. 공무원 따위(?)가 최고 인기직종인 사회는 조선일보도 우려하고 진중권도 조소한다. 대학 진학률이 높아서 문제라는 얘기는 이명박 대통령도 하고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도 한다. 문제는 그렇게 뻔하게 있는데, ‘이기적 개인들의 선택’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사회정책을 입안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미약하다. 체제는 스스로 변하지는 않을 거다. 뺏기기 시작한 사람들은 계속 뺏길 것이고 욕망을 거세당한 이들은 그 룰 속에서 아둥바둥 뛰어갈 것이다.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가? 누구들이 힘을 합쳐야 이런 문제를 끝낼 수 있나? 세대론이 옳으냐 계급론이 옳으냐와 같은 문제제기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어떻게’에 대한 이러한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뾰족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현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출발점이다. 세대담론은 물질적으로나, 담론적으로나, 계급문제가 철저하게 정치에서 배제된 결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담론이다. 그리하여 ‘계급의 문제’를 넘어서기에 더 쉬운 연대가 가능할 거라고 역설하지만, 실은 노동계급이 얼마나 가진 것이 없는지를, 그들의 투쟁의 출발선이 얼마나 뒤로 물려져 있고 그래서 얼마나 무력한 지를 폭로하는 담론이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거세당한 욕망을 권리로 인지하고, 그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세상은 지금으로선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다. 그렇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고립’은 투쟁의 성공이 아니라 투쟁 자체가 꿈이 되어버린 세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꼬리를 씹어먹은 뱀의 머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신체를 잠식할 것이다. 미래는 없지만, 그들에게 다른 방법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불행해지더라도 지금까지 그랬듯 우리모두 아등바등 살면서 뱀 머리의 특권을 유지시켜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모든 이가 공평하게 욕망을 거세당한 사회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런 결말을 피하고 싶다면 우리가 포기한 부분들, 우리의 몸에서 잘려나간 부분들을 응시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쌍용자동차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며, 문제를 대면하고서야 투쟁에 나서는 습속을 반복할 때, 노동운동과 젊은이들은 영영 서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둘 다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 출처 : yhhan.tistory.com - How many cuts should I rep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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